음악 에세이 16 - 죽어 있는 삶을 살리기 위해서
“지상에서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죽은 사람과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다.”
뒤늦게 들어선 음악의 길을 한결같이 걸어오신 한 작곡가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비유하셨다. 두 사람이 천상에 갔을 때 한 사람은 “땅에서도 천국의 음악을 들었었는데, 실제로 와보니 그보다 더 좋은 음악도 있네요!”라고 신에서 경탄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에겐 신이 “자네는 세상에서 어떻게 모차르트의 음악도 듣지 못하고 살았었나...”라며 탄식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음악가이기 때문에 할 법한 이야기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음악을 하는 친구가 택시를 탔다. 그곳에서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단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클래식을 좋아하세요?”라고 기사님께 물었더니, “클래식을 못 듣고 죽으면 세상의 반 밖에 못 보고 죽는 것과 마찬가지예요”라고 대답했단다. 클래식 음악을 하는 우리들도 누군가에게 선뜻 말하기 힘든 얘기를 뜻밖의 곳에서 들었다며 친구와 놀라워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반대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남들과 달리 클래식이 세상의 전부인 듯 살고 있음에도 남에게 선뜻 ‘클래식은 세상의 반’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나는 쉽게 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용기의 결핍일까, 아니면 확신의 결여일까?
그러나 사실 클래식 음악이 세상의 얼마를 차지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또한 클래식을 아는가 모르는가가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니다. 그렇지만 살수록, 들을수록 클래식 음악을 소수의 사람들만 누리고 있다는 것이 아쉬워졌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이 살면서 누려야 하는 특권이었다. 이렇게 좋은 것을 몇 명만 누리다니... 자주 안타까웠으며, 때로는 미안하기까지 했다.
몇 년 전에 한 영화가 개봉됐다. 영화 선전 문구 중에 ‘그레고리안 성가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관객의 영혼을 움직일 것이다’라는 구절이 뇌리에 박혔다. 극장을 자주 가는 편은 아니지만 이 영화만은 꼭 극장에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눈 뜬 순간부터 그렇게 많은 것들을 보건만, 정작 보고 싶은 것을 볼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면서 종영을 할까 봐 맘 한 편에서 계속 조바심이 일었다. 다행히 호응이 좋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영화관에서 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영화 <신과 인간>은 이슬람이 지배하는 알제리의 한적한 수도원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그곳에는 정치적 위협 속에 있는 일곱 명의 프랑스 수도사들이 등장하는데, 만약 그들이 종교적 신념을 지킨다면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겪는 그들의 갈등과 결단의 과정이 그레고리안 성가의 울림 속에서 펼쳐진다. 신과 가장 맞닿아 있는 이들의 삶의 목적은 곧 죽음의 목적도 되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여전한 삶의 방식을 지킨다.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죽음을 선택한 것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들은 빵과 포도주를 나눈다. 그때, 한 신부가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중 ‘정경’을 틀었다. 오직 신께 올리는 청아한 그레고리안 성가만이 퍼지던 수도원에서 들리는 뜻밖의 울림이었다. 그리고 깊고 짙은 정서가 담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흐르는 동안 그들의 가장 인간적인 마음속 풍경이 극적이며 진솔하게 드러난다. 지극한 희열이 담긴 웃음이 흐르다가 이내 처절한 고뇌가 담긴 눈물이 흐른다. 그들은 그렇게 삶을 보내고 죽음을 준비한다. 최후의 만찬에서 나누는 빵과 포도주, 그리고 영혼의 양식인 음악.
하루하루 죽음을 생각하며 씨름하는 한 친구에게 이 영화를 꼭 보라고 했다. 시선을 돌리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이 친구와 한 카페에 갔다. 서가가 있는 카페였다. 무심코 책들을 둘러보다 <죽기 전에 해야 할 1001가지> 코너에 시선이 멈췄다. 한 권 한 권 만만치 않은 두께의 책이었는데 한 칸이 그 시리즈로 다 채워져 있었다. ‘죽기 전에 해야 할 것이 왜 이리 많아?’ 속으로 생각하는데, 친구가 <죽기 전에 들어야 할 클래식 1001>을 뽑아 들었다. 그러면서 어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들었다고 했다. 힘겨운 상황에서 그 곡을 들었을 친구의 속내를 짐작했지만 나는 “나머지 1000곡은 어떻게 할 거야?”라고 짐짓 농담을 건넸다.
친구는 “그러게... 아주 오래오래 살아서 다 듣고 죽어야겠다...”라며 웃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곧 죽기 전이라는 말일 것이다. 우리보다 앞선 이들의 탄생일 바로 옆에 귀천일이 적혀 있는 것을 상기할 때, 살아 있는 우리 역시 언젠가는 비어 있는 오른 칸이 채워지는 결정적인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면서 순간순간 무감각 속에서 무수한 시간들을 허비하기도 한다. 허무와 권태에 사로잡혀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한다. 죽기 전에 꼭 해야 하는 버킷 리스트가 그렇게나 많이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나 보다.
죽어있는 삶을 살리기 위해.
삶에 대한 감탄과 갈망을 시시로 생생하게 일깨울 수 있는 것에 음악만한 것이 또 있을까. 아까운 삶, 음악과 더불어 그래도 아쉽지 않게 살다가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쌓여’ 아름답게 떠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