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에세이 18 - 큰일 났네! 정신없다!
한 학회에서 ‘예술가와 시대정신’에 대한 토론을 하던 중에 “오늘날의 시대정신이 무엇인가?”라고 사회자가 질문했다. 누군가가 농담처럼 “정신없다”라고 답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날 시대정신에 대한 많은 논의가 오갔는데 지금까지 이 대답만이 기억에 남는다. 쉽고 웃고 넘길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정신 차리고 살기 힘들다고 호소하는 말을 여러 번 들은 터였다.
“큰일 났네, 큰일 났어. 정말 늦어버렸어!”
사방팔방에 회중시계를 끊임없이 보면서 급히 뛰는 토끼가 있다. 그 뒤를 앨리스가 영문도 모르고 덩달아 허둥지둥 뒤좇다가 토끼와 함께 굴에 들어간다. 그런데 토끼와 앨리스가 가득한 이곳은 어디인가?
다섯 살짜리 꼬마애가 새벽 5시경이면 어김없이 말짱한 정신으로 깨어났다. 인형을 손에 쥐어줘도 전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궁리 끝에 부모님은 혼자서 놀 수 있는 피아노를 시켰다. 그렇다고 대단한 재능을 발휘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지나가던 길에 피아노 학원에 들렀던 아이의 친구 엄마는 사과 한 개와 사과 반쪽이 왜 4분음표와 8분음표와 같은지 이해하지 못해 선생님께 혼나고 있는 아이를 목격했다. 아이의 부모님은 진지하게 아이에게 물었다. “정말 피아노가 배우고 싶니?” 아이는 끄덕였다. 아이는 그 시절 대부분이 그랬듯이 자로 손등을 맞아가며 피아노를 배웠다. 어느덧 피아노 치는 시간은 혼자 노는 시간이 아니라 혼자 남겨진 시간이 됐다. 아이에게는 다른 탈출구가 필요했다.
텔레비전과 친구가 금지된 아이에게 책 속 세상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아이는 사정없이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피아노를 통해 현실의 고달픔을 이미 진득하게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철도 일찍 들었다. 동화책을 일찍 끝낸 아이는 고전의 세계로 들어갔다. 연습 시간이면 문을 잠그고 손을 돌아가는 대로 두면서 악보 대신 책을 읽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어느 날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펴놓고 아무렇게나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얼마나 몰입했는지 방문을 안 잠근 것도, 엄마가 외출에서 돌아온 것도 몰랐다. 책과 함께 그대로 밖으로 쫓겨났다. 그 뒤로도 몇 번의 충격과 충돌이 이어졌다.
끝없이 몰아치던 아이의 엄마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결연하게 말했다.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아라." 막상 그 순간이 되자 아이는 피아노에서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취미가 전공이 될 수는 있지만 전공하려던 것이 취미가 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평생 피아노를 볼 때마다 회한에 잠기기는 싫었다. 게다가 피아노는 얼마나 눈에 잘 띄는 흔한 악기인가.
그렇게 다시 피아노와 붙어 지냈다. 그런데 피아노를 전공하는 이들이 피해갈 수 없는 작곡가가 있다. 베토벤이다. 사실 그는 도무지 좋아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입시와 시험 때면 빠지지 않고 나타나 괴롭혔다. 그와 화해하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베토벤 때문에 고민할 수 있는 삶이 얼마나 축복된 삶인지를 깨닫기 위해 수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얼마 전에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개 중 작품을 고르기 위해 제1번부터 찬찬히 악보도 보고 음반도 들어보는데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지고 있던 베토벤 소나타 악보에서 아다지오 악장들만 배운 흔적이 없었다. 대개의 작품에서 제1악장과 제3악장이나 제4악장, 즉 빠른 악장들만 친 것이다. 악보를 보며 기막혀하는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귀에 들여오는 느린 악장들의 아름다움이었다. 이런 악장들이 매 작품마다 숨어있었다니... 어쩌면 베토벤을 이해하기까지 삶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부끄러운 고백을 하는 것은 나를 열심히 가르치셨던 선생님들을 원망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 뒤에는 열정보다 의무감과 의지를 불태우며 맹목적으로 따르던 내가 있다. 시험 볼 때마다 시험에 들었으며 연습과 연주의 목표는 좋은 점수와 그럴 듯한 평가였다. 쫓기듯 늘 불안하고 조급했다. 대학교 졸업 연주를 앞두고 연습에 지친 친구가 외쳤다. “나, 졸업 연주만 끝나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에 내심 공감했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무슨 일을 해도 다시 그 순간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음악과 함께 아름다움과 진실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해 모든 것을 지불할 수 있다고 배포 있게 말하던 그때가 말이다.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일 누리지 못하는 음악가들을 만드는 사회는 확실히 이상하다. 음악 하는 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음악 얘기보다 음악 할 수 없는 현실 얘기를 더 많이 한다. 현실적 보상만이 음악의 목적이 아닐진대 말이다. 음악하자고 모였으면 음악 얘기를 하자는 말이 이상주의자의 외침이 될 때가 많다. 근본을 지키고 싶은 이상주의자는 병든 세상을 아파하다가 병들었던 나를 본다. 강박증, 조급증, 자폐증, 편집증 등 다양한 증상이 뒤죽박죽 얽혀있다. 정신을 차리고 바라본 내가 낯설다. 이러한 병폐가 혼자만의 문제일까.
“세상의 모든 불행은 단 하나의 이유, 방 안에서 조용히 휴식할 줄 모르는 데서 온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 쉼표 없는 악보처럼 숨통을 조이는 세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제정신으로 살기 위해서는 사유의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아다지오 악장에서 헐떡이던 숨을 비로소 고를 수 있다. 깊고 충만한 호흡은 다음의 빠른 악장으로 이어진다. 압박감이 아니라 역동성이 가득한 활기찬 질주.
삶에도 음악에도 느리고 고요한 시간이 필요하다. 쫓아다니고 쫓겨다니며 살지 않기 위해, 자신조차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살지 않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