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안 와인 러버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피에몬테
신혼여행을 기획하면서 가장 먼저 방문지로 정한 곳은 피에몬테 지역이었다. 피에몬테 지역은 그 유명한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 마을을 품고 있다. 한국에서 잘 숙성된 바롤로나 바르바레스코 와인을 마시기엔 주머니 사정이 부담되었지만, 생산지에 가면 좀 더 합리적인 가격에 오래된 빈티지의 와인을 만나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있었고, 송로버섯(트러플)도 실컷 먹고 싶었다.
우리는 밀라노에서 하룻밤을 자고, 렌터카를 픽업해 Alba로 향했다. 둘의 첫 유럽이자 첫 렌터카 여행. 운전을 제법 잘하는 그였지만, 그래도 조금은 긴장이 되었다. 예상대로 이탈리아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은 매우 빨랐다. 이내 익숙해진 남편은 속도감을 즐기기 시작했다. 탁 트인 하늘과 유럽풍 구름을 즐기며 2시간 30분을 달려 피에몬테주의 알바, 트러플의 성지에 도착했다. 알바를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알바에서부터 바롤로, 바르바레스코까지 자동차로 30분 내에 모두 도착할 수 있는 도시였으며 맛있는 음식점들과 아기자기한 상점들 그리고 보석 같은 와인샵으로 유명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약해놓은 에어비앤비에 짐을 풀었다. 알바 시내가 내려다보이고, 건너편에는 언덕 위 굽이굽이 펼쳐진 포도밭을 전망할 수 있는 멋진 숙소였다. 저녁노을이 지기 전에 시내를 구경하기 위해 편한 신발로 갈아 신고, 숙소를 나섰다.
기대한 대로 알바 시내는 구석구석 볼거리가 많았다. 골목골목 작은 뜨라토리아, 와인샵, 트러플 가게인 타르투포가 우리를 유혹했다. 구글맵 후기와 와인 커뮤니티 후기를 뒤져 찾아둔 3곳의 와인샵을 방문했다. 그중 한 곳에서 보석 같은 와인 두 병을 구입했다.
큰 가게는 아니었지만 다른 두 곳 보다 오래된 빈티지의 와인을 아주 많이 보유하고 있는 가게였다. 그리고 주인 할아버지의 신뢰감이 드는 추천과 그 가게의 명함이 한몫했다. 작황이 좋았던 해의 와인을 구입하고 싶어서 자꾸 "2006년은 좋은 해였나요?" "13년도는요?"라고 계속 물어보자, 명함을 주셨다.
명함 뒤를 보니 이 지역의 빈티지 차트가 적혀있었다. 우리는 2000년과 2003년에 병입 된 바롤로 두 병을 구입했다. 22년 전 담근 포도주를 마시는 느낌은 어떨까?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또 다른 가게에서는 각각이 태어난 해에 만들어진 와인을 발견하기도 했다. 지하 셀러에 고이 뉘어져 있는 와인을 지켜보며, 이 지역 사람들은 술이 아니라 세월을 마시는 걸 즐기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에 와인 두 병을 단단히 챙겨 메고, 트러플 제품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방문했던 8월 31일은 아직 트러플 수확시기가 아니었기에 신선한 화이트 트러플을 만나는 것은 어려웠다. 아쉬운 마음에 블랙 트러플 절임과 화이트 트러플 치즈 소스 그리고 트러플 향이 나는 따야린 면을 한 봉지 구입했다.
배가 고파왔다. 왜 꼭 쇼핑을 하고 나면 허기가 질까. 추천받은 레스토랑 중 한 곳을 찾아갔지만 문 앞에는 여름휴가 중이라는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등골이 싸늘해져 왔다. 알바는 관광으로 먹고사는 도시라기보다는, 트러플 철에는 트러플 바이어들이 와인 릴리즈 시기에는 와인 바이어들이 철 따라 들러 비즈니스를 하고 돌아가는 도시이기에... 밀라노나 피렌체, 로마처럼 남들이 여름휴가 갔을 때도 문을 여는 식당들이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이미 여행을 계획하면서부터 예약 문의를 여러 곳에 했지만 알바 시내의 대부분의 식당들이 9월 초부터 다시 영업을 재개했다.
하지만 마지막 옵션이 있었으니,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적어준 추천 리스트 중 유일한 'Enoteca'는 영업 중이었다. 와인 리스트는 꽤 좋았지만 전통 피에몬테식 식사를 하고 싶어서 2차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배가 점점 고파오다 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앉자마자 그리니시와 헤이즐넛을 받았다. 어쨌든 이곳도 이탈리안 식당인 것이다. (이탈리아의 대부분의 식당은 식사에 앞서 와인과 곁들일 주전부리를 내어준다) 우리는 헤이즐넛을 입에 하나씩 넣으며 즐겁게 와인 리스트를 훑고, 바르바레스코 한 병과 이탈리아에서 꼭 맛봐야 하는 햄인 prosciutto crudo 그리고 라구 따야린을 주문했다. 피에몬테의 전통적인 여름 디쉬인 비텔로 톤나토도 잊지 않았다. 얇게 저민 송아지 뒷다리 고기에 참치를 섞은 화이트소스를 얹어먹는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요리 중 하나다.
음식을 기다리며 Arneis (피에몬테 지역의 화이트 품종) 한 잔을 마시고, 바르바레스코로 넘어갔다. 일단, 무엇보다도, 와인이 너무 맛있었다. 충격적으로 입맛에 맞아서 둘 다 탄성을 지르며 와인 한 병을 비웠다. 마무리는 라구를 듬뿍 올린 따야린(짜파게티 대신)으로 마무리 후 다시 숙소로 향했다.
하루 종일 긴장한 탓인지 은근 취기가 오른 우리는 손에 젤라또를 하나씩 쥐고 술을 깨며 다시 숙소가 있는 포도밭 언덕길을 올랐다.
여행의 중반부, 토스카나 지역의 아그리투리스모에서 머물던 날 저녁 식사 때 알바에서 구입한 와인 중 한 병을 마셨다. 그날의 메뉴가 와인과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특별히 요청드려 페어링을 해보았다. 2000년 빈티지의 바롤로를 저녁 식사 1시간 전부터 오픈해 병 브리딩을 해두었다. 은은하게 올라오는 흙내음이 인상적이었고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마셨던 어떤 와인과도 달랐다. 뭐랄까 젊은 와인들이 가지고 있는 매력은 포도 열매 자체의 뉘앙스에서 온다고 한다면, 이 나이 든 와인은 '포도'주보다는 포도'주'에 가까웠다. 그리고 젊은 바롤로에 비해 탄닌이 무척 부드럽고 매력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함께한 토스카나 음식들도 멋졌지만, 그날 식사의 주인공은 단연 바롤로였다.
나머지 한 병은 비행기로 잘 모시고 와서, 우리 집 셀러 한편에 잘 누워서 쉬고 계신다. 좋은 날이 오면 신혼여행의 추억을 떠올리며 집사람과 함께 맛을 봐야지.
우리가 가게에서 구입해 마시는 대부분의 와인은 시음 적기의 와인들이다. 하지만 어떤 와인은 잘 묵혔다가 마셨을 때 그 매력이 더 빛난다. 모든 것에 때가 있듯이 결혼도, 와인도 다 때가 있나 보다.
피에몬테 와인 이야기가 더 궁금하시다면
- 추천 도서 : <산 로렌조의 포도와 위대한 와인의 탄생>
피에몬테 와인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린 GAJA 와이너리의 스토리를 담은 논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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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롤로의 유명 생산자인 Giacomo Conterno의 와인메이커와의 대화
https://www.youtube.com/watch?v=eVlsUMg6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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