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딸들에게
띠링. 새벽 한 시가 넘어가고 있을 즈음 휴대폰 화면에 카톡 알림이 떴다. 언뜻 봐도 짧은 문장이 대충 짐작 가는 내용이라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부고> 동문 000 모친께서 8월 0일 영면하셨기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동문 단체 채팅방에서 보내는 부고 소식을 받기도 전에 친절하게도 친구는 내게 따로 문자를 보내주었다. 아마도 곧 내게도 다가올 일이기에 좀 더 챙기라는 뜻이기도 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출처: pexels
며칠 전 엄마의 정기검진 때 피검사 결과를 본 의사 선생님은 당일에 바로 입원을 권하셨다. 지난번 입원 이후 퇴원한 지 6개월 만에 다시 입원하라는 말이 어쩐지 예전 하고는 느낌이 달라 불안한 마음으로 엄마를 입원시키고 돌아오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네, 여기 00 병원 간호사인데요, 어머님 폐렴이 심하시고 결핵이 의심되어 부득이 격리병실로 옮겨야 하는 상황이라 유선으로 보호자분께 알려드립니다"
아! 엄마를 이제 보지 못할 수도 있는 건가 싶어 홀로 병상에 있을 엄마를 생각하니 지난날 엄마와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고등학교 2학년. 아빠의 임종 소식도 모른 채,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왔을 때 엄마는 주방 구석에서 당신의 몸을 숨기고 끅끅거리며 흐느끼고 있었다. 당연히 아빠가 돌아가셨으면 목 놓아 울어도 시원찮을 텐데 엄마는 왜 숨어서 우는지 의아했다. 그런 나를 보자마자 엄마는 "너 불쌍해서 어쩌니.." 하며 그제야 대성통곡을 하셨다. 졸지에 아비 없는 자식이 되었다며 나를 쳐다보며 흘리던 엄마의 눈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출처: pexels
그날 이후 엄마는 더 이상 내게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이모에게 나를 부탁하고선 공사현장에서 밥집을 하느라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24시간 돌아가는 공사 현장에서 엄마는 밤새도록 일에 매달렸다. 그렇게 엄마를 방학이나 명절에만 만날 수 있는 나 자신의 처지가 불쌍해 투정을 부릴 때면 "대신 남들보다 몇 배로 다 해줄게. 남부럽지 않은 딸로 키울 거야. 알았지?"라며 단호하게 말하는 엄마가 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엄마는 약속대로 대학생이 된 딸에게 자동차를 사주었고, 해외연수를 보내줬다. 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남의 밑에서 힘들게 직장 생활하는 대신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냥 얌전히 신부수업을 하다 좋은 신랑 만나는 게 사실 엄마의 바람이었다. 행여 아비 없는 자식 소리를 들을까 싶어 보상심리로 엄마는 나에게 집착했다. 마음 같아서는 열쇠 3개를 쥐어주어서라도 능력 있는 신랑감을 맺어주고 싶다며 맞선 자리에 불쑥 나타나 내 뒤에서 상대 남자를 보고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나가버리는 암묵적인 사인이 있을 때면 나는 애프터 신청을 거절하고 나와야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친구들은 내게 '마마걸'이라는 별명을 지어줬고 나의 20대는 엄마에 의해 움직이는 인형처럼 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피하면서 편안함을 얻을 수 있었던, 그래서 적당히 즐기면서 살아가는 삶을 택했었는지도 모른다.
단 한 번도 아프다, 힘들다 하는 표현을 한 적 없는 엄마는 내게 무엇이든 못하는 것이 없는 해결사였고, 철의 여인이었다. 그러던 엄마가 갑자기 뇌출혈로 과 심근경색으로 두 번의 큰 수술을 받게 되었다. 친척들은 우왕좌왕 사업채와 재산정리에만 관심을 보였고, 난 주인 없는 고양이처럼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엄마가 없는 삶을 상상하며 울기만 했다. 이런 나를 예상했다는 듯이 엄마는 "우리 딸 때문에 나는 죽으면 안 돼요."라며 중환자실에서 벌떡 일어나는 기적을 보여 간호사들을 놀랬켰다. 철의 여인임을 증명한 엄마였다.
엄마의 수술을 계기로 자연스레 나는 결혼을 서둘렀고, 단 두 식구에서 남편과 두 아이가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되어 드디어 출산과 육아를 책임져야 하는 엄마가 되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밤새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과잉보호 속에서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울기만 했던 나는 어느새 리트머스 종이처럼 엄마의 방식을 그대로 흡수해버리는 더 유별난 엄마가 되어버렸다. 두 아이에게 뭐든 최고를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 앞 뒤 재지 않고 한국을 떠나게 되었고, 40년 만에 처음으로 엄마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 딸을 배웅하던 엄마의 눈물을 보지 못한 채 한국을 떠났다. 눈물 반 못 본 게 아니라 어느새 점점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 가는 엄마를 그렇게 잠시 잊었다.
출처: 내 사진첩
10년 만에 귀국을 하니 많은 게 변해있었고, 변화에 적응하느라 또 한 번 무리수를 둔 계획에 정신없이 지내던 어느 날 이모에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진이야! 엄마가 이상해. 자꾸 헛소리를 하고... 전화만 하지 말고 이참에 모시고 같이 지내면 안 되니?"
순간 호흡을 잠시 멈췄다가 숨을 토해냈다. 지금까지 내내 계속 엄마는 괜찮으니 걱정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며 여전히 나를 무한정 응원했었는데.. 며칠 후 엄마 집에서 짐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서랍 옷가지 속에서 발견된 엄마의 일기장에는 삐뚤고 맞춤법도 틀렸지만 나를 외국으로 떠나보냈던 날부터 매일 밤 울면서 딸과 함께 지내고 싶었음을 토해내며 쓴 눈물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몰래 숨어서 끅끅거리며 울면서 엄마의 일기장을 덮었다. 어깨를 만져봐도, 다리를 쓰다듬어봐도 앙상한 뼈만 잡히고 약 먹는 거에 집착하면서 가끔씩 나를 향해 내 이름이 아닌 손녀의 이름을 부를 정도였던 엄마의 상태를 이제야 알아보다니....
딱 너 같은 딸만 낳아라
모녀 관계는 업보 때문에 맺어진 인연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어미에게 하도 마음고생을 시켜 딸을 낳는 거라고.. 그래서 내게도 딸이 있는 건가. 때로는 못되게 굴어도 뭐든 내 눈에 용서가 되었다. 우리 엄마도 이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pexels
평생 딸만 생각하던 딸바보 엄마. 작년 추석에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굳이 우겨서 엄마를 우리 집으로 모셔왔다. 연휴를 같이 지내면서 손녀가 끄는 휠체어를 타고 바닷가 산책을 하며 좋아하는 생선회도 함께 먹었다. 석양이 지는 바다를 바라보는 엄마의 뒷모습에 왜 그렇게 가슴이 시렸을까.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싶어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었다. 기저질환으로 폐렴이 심해져 균 검사를 위해 1인 격리병동으로 옮긴다는 간호사의 연락을 받고 엄마에게 전화를 하니 여전히 본인보다 나를 걱정하고 계셨다.
"검사도 잘 받고 밥도 잘 먹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옆 사람들도 잘 챙겨주니까 너 일이나 잘해. 끼니 거르지 말고."
'거짓말. 엄마 지금 혼자 있잖아.' 하는 생각에 또 울컥해졌다. 바닷가에서 찍어두었던 엄마의 처연한 뒷모습이 담긴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각자의 이유로 자신의 삶에서 엄마를 배제시키고 있는 이 세상 모든 딸들에게 이 말 한마디만 말해주고 싶다. 당신들의 엄마도 어쩌면 서툰 글로 딸이 보고 싶다며 일기를 쓰고 계실지도 모르니 나처럼 너무 늦게 깨닫지 말고 엄마와 함께 소소한 일상을 즐기고 챙겨드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값진 것임을 꼭 알기 바란다.
출처: 내 사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