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이 많은 내게 내리는 처방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수십 개의 걱정들이 밀려오는 날이 있다. 대개 중요한 약속이나 발표를 앞두고 있을 때면 아무 소리 없이 걱정들이 내 뇌리를 두드리곤 한다. 이런 날엔 내 머리 속은 버스나 전철 시간에 대한 걱정부터 혹시 모를 대형 사고, 혹은 더 나아가 내 자아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이르는 갖가지 걱정들로 가득하게 쌓여간다. 이럴 때면 가뜩이나 생각이 많은 내 머리 속은 소화가 되지 않은 듯 더부룩하고 답답해진다. 특히 이러한 답답함은 초초함이라는 감정으로 변하여 손끝으로 전해지곤 하는데, 누군가 이 손을 바늘로 따서 소화 좀 시켜 달라는 듯 달달 떨려올 때도 있다.
난 매일 매시 매분 매초 무언가에 대해 고민하고 걱정하며 해결책이나 답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나만의 답을 내리면서 걱정들을 내 머리 속 서랍들에 차곡차곡 정리해나간다. 이렇게 걱정들에 대한 답을 매기면 내게 닥칠 여러 경우를 대비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이 생기면서 정신적 편안함이 찾아오는데, 나는 이걸 스스로 ‘걱정 소화’라고 부른다. 주변에서는 피곤하게 뭐 그렇게 걱정하고 계획을 하냐고 혀를 내두르지만 내게는 이게 안정을 취하기 위한 하나의 심리활동이자 소화작용인 것이다.
그런데 무작정 걱정이 밀려오는 날이면 나의 소화 능력이 몰려오는 걱정들을 감당해내지 못한다. 내가 걱정에 대한 답을 내놓는 시간보다 걱정들이 쌓여가는 시간이 너무나 빨라서 내 안에 있는 걱정 소화 세포들은 금세 소화를 포기하곤 널브러지고 만다. 난 이렇게 걱정들에 휩싸여 초조해지는 날이면 ‘걱정을 소화해주는 걱정 소화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의미 없는 공상에 잠기곤 한다.
내가 상상한 걱정 소화제의 효능은 이렇다. 먼저, 걱정 소화제는 걱정을 삭제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 소화제도 우리가 먹은 걸 없애는 게 아니라 소화를 촉진시키는 일을 하듯이 걱정 소화제도 뇌의 정보 처리 체계를 가속화시켜 걱정 소화의 능률을 올리는 방식으로 약이 작용한다. 그리고 막혀 있던 소화의 창구를 다시 뚫음으로써 본체에게 걱정이 소화되고 있다는 안정감을 지속적으로 인지시켜 본체로 하여금 걱정을 덜 하게 만드는 약인 것이다.
또한 걱정을 소화시키면서 발생한 모든 해결책들이 뇌에 방치하게 되면 저장소에서도 과부하가 올 수 있기 때문에 걱정 소화제는 이러한 해결책들을 정리하는 일도 돕는다. 걱정이 완전히 소화되는 과정은 내가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라고 해결책을 인지하는 것에서 끝이 난다. 그렇기에 걱정 소화제는 해결책을 발견하는 즉시 본체에게 이를 인지시켜 빠르게 해결책을 소모하거나 증발시키게 돕는다.
“엥? 해결책을 증발시키면 걱정한 의미가 없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해결책을 실제로 실행해서 걱정을 해소하는 것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기보단 해결책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해결책이 실제로 실행되는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종종 같은 걱정을 여러 번 하기도 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걱정 소화제는 걱정을 빠르게 소화하여 해결책을 만들되 그 해결책이 본체에 인식되는 즉시 해결책을 기억 관리처로 넘겨버리면 되는 것이다.
이런 약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삶이 편안해지지 않을까? 물론 걱정이 사라진 세상은 굉장히 나이브하고 낙천적이라 안전 불감증이 만연한 세계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처럼 평소에 걱정과 잡념이 많아 잠을 설치는 사람들에게는 걱정 소화제가 종종 필요할 때가 있다. 긴장이 심한 사람들에게도 청심환보다 걱정 소화제가 더 잘 먹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뭐 그래봐야 걱정 소화제는 내 공상일 뿐이다. 그래도 이과 분들 중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훗날 발명될 수 있지 않을까?
“코로나 백신도 1~2년이면 나오는 세상인데 못할 게 뭐 있어?”
쉴 새 없이 변화와 발전은 거듭하는 사회를 보며 나는 또 막연한 기대를 걸어본다. 그리고는 오늘도 난 자기 전에 걱정 소화제를 먹는 상상을 하면서 베개에 걱정 가득한 머리를 내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