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에서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한다는 것
뭔가 제목이 조금은 거창(?)한가 싶은데, 현실에 스타트업의 1인 디자이너는 너무도 많기에
이전의 커리어 흐름부터, 현재의 디자인 업무 이야기까지 내가 겪은 현실과 업무적인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나가 볼까 한다.
현재는 1인 디자이너는 아니고, 물류 스타트업에서 주니어 디자이너 분과 함께 디자인 파트 파트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회사 내에서 운영하는 서비스(브랜드)는 3개가 있고, 이 부분은 차후 다른 글에서 소개하겠다.
나의 경우는 중간에 커리어 전환이 있었다가, 다시 디자이너로 돌아온 케이스다.
4년제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약 2년 정도 UIUX디자이너로 근무를 했다. GUI 디자인, GUI 가이드라인 작업과 폰 테마 디자인이 주 업무였고, 주로 멜론, 시럽, 한화 테크윈, LG U+ 등 대기업 클라이언트의 디자인 작업을 했다. 요즘도 가이드라인 문서를 작성하는 대기업들이 있는데, 2015년도에는 현재와 같은 Zeplin, Figma툴이 활성화되어있지 않아서, GUI 가이드라인 문서 작업이 필수였다. 여담이지만, 당시에는 문서 작업을 디자이너가 왜 해야 할까에 대한 회의감이 많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첫 회사에서 화면 구조에 대한 이해와 디자인 기본기를 제대로 익혔다는 생각이 참 많이 든다.
이후, 나는 2017년도에 일반대학원을 진학해서 문화예술경영학을 공부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대학원을 진학할 때, 디자인대학원을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디자인을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고 디자이너로 일하기보다 예술의 영역 안에서 기획자로써 디자인을 활용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또, 덧붙이자면 실용 예술인 디자인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예술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고, 이론에 대한 갈증도 컸었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는, 시리즈 A 투자로 약 150억을 유치한 스타트업에 MD직군으로 입사를 했다.
소규모의 팝업스토어부터, 대형 팝업스토어 행사까지 영업, 기획, 브랜드 소싱/관리, 행사 운영(설치/철수), 매출정산, 반품처리 등 A-Z까지의 기획 MD 업무를 1년 간 했다. 디자인 직무로 입사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디자인 부서를 통해 업무를 요청하고 전달받아 운영을 했었고, 사무직과 현장직의 경계에 있는 직무였다. 사실 사회초년생 때 나는 디자인 직무가 가장 힘든 일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때의 경험이 굉장히 인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정해진 시간에, 앉아서 하는 일에 대한 감사한 마음
MD 직무로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하다 보면, 야간 설치/철수 작업은 피할 수가 없었다. 밤 10시부터 새벽 2,3시까지 일을 하고 오픈 시간 전 새벽에 행사 오픈 준비를 했는데, 업무가 재미있는 것에 반해 체력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다. 머리 쓰는 일도 물론 힘들지만 힘쓰는 일은 더 힘들다는 걸 알게 됐고, 행사물품들을 옮기며 나간 어깨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ㅎ)
하루 종일 회사에 앉아서 일하는 게 지루할 수 있지만, 앉아서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또, 무엇보다도 9 to 6로 근무하는 환경도 당연하지 않다는 걸 경험했고.
그리고, 함께 근무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도 갖게 되었다. MD로 근무할 때 다양한 브랜드 담당자와, 대표님들, 그리고 유통사 담당자들, 고객들을 대하면서 모든 분들이 우호적이었던 건 아니었다. 매출과 직결된 부분이 있다 보니 업무를 하면서 예민한 감정들에 노출되기도 하고, 인류애를 살짝 잃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2020년도 초 갑자기 시작된 코로나의 영향으로 오프라인 시장이 많은 타격을 입으면서 다시 온라인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도 컸다. 오프라인 행사 취소로 인해 매출 타격이 컸고, 무급 휴직도 있었고,..
정리하자면, 다른 경험들로 인해 디자인이 내게 다시 즐겁고 감사한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비즈니스를 유연하고, 적절하게 서포팅 하자
보통의 디자이너들은 본인의 디자인에 대한 강한 프라이드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나 또한, 여전히 그렇지만 디자이너와 '협업'하는 업무 포지션에서 근무해 보니, 디자인에 대한 시각이 조금 바뀌었다.
현장에서 기획/영업/운영 등을 하다 보면 시의적절하게 대응해야 하는 상황들이 마구 발생하는데, 이때 정해진 협업 프로세스대로 업무 요청을 하기란 쉽지가 않다.
예를 들어, 행사를 세팅해 놓고 보니 홍보용 POP가 부족해 바로 디자인 및 출력해 부착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회사 내에 디자인 협업 프로세스대로 '협업 요청서'를 양식에 맞춰 작성하고, 전달하는 과정을 거치면 꼭 필요한 상황에 시의적절하게 디자인이 도달할 수가 없다. 행사 클라이언트 혹은 소싱 브랜드의 컴플레인이 발생할 수 있고, 행사 운영 매출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비즈니스 상황에 적절한 '긴급 업무 협업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절차에 맞게, 신경 써서 잘 디자인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의 비즈니스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유연하고, 적절하게 서포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디자이너는 직무일 뿐, 어떤 롤을 수행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스타트업에서는 롤의 분리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대기업은 다녀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업무 R&R이 명확하지 않아 발생하는 문제와 너무 명확하게 구분 지어 일하는 것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많지만 이건 경영자의 고민이라 차치해 두고, 직원으로서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해 보자.
스타트업에서 한 사람이 A-Z까지 다양한 일들을 수행하는데, 물론 이게 당연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초기 스타트업에서는 프로덕트 디자인을 하면서, 기획이 미비된 부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단단한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기능들도 함께 고민해야 하고, 정리되지 않은 기능 표기들에 대한 UX라이팅도 함께 고민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스타트업에서 필요한 업무는 너무도 많고, 업무에 1:1로 대응해서 이건 누군가의 롤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담당자가 없는 경우가 정말 너무도 많다. 이때, 나의 일이 아니라는 마음으로 내가 만들고 있는 서비스를 대하면 서비스는 날개가 없는 새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경험한 바로 스타트업이라는 곳에서 일하기에 적합한 유형의 사람은 바로 회사의 비즈니스를 계속해서 궁금해하는 사람들이다. (오너십을 가지고 업무 하려면, 사실 그만한 동기부여야 있어야 하고)
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 등 하는 일은 모두가 다르지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장, 회사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서비스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 같다. 우리 회사의 비즈니스를 계속 궁금해하고, 변화하는 방향을 수용하면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마음가짐 일 뿐, 이게 맞다는 말은 아니다.
앞으로 나의 경험들이 쌓여, 시간이 흐른 뒤에는 또 다른 마음가짐을 갖고 일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디자이너라는 직무로 스타트업을 고민하는 분들에게 약간의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다가갔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