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야영은 언제나 즐겁다
밤낮이 바뀌었다. 새벽녘에 잠들어 늦은 아침에 일어나고 있다. 일어나면 마을 구경을 하고 브런치를 먹은 다음 열두시 무렵이 되어서야 출발하곤 한다. 달팽이처럼 걷는다. 내 눈과 가슴과 카메라에 최대한 많은 극적인 장면들을 담기 위해서다. 성당이 보이면 들어가서 힘을 얻는다.
페르세우스 유성의 비가 쏟아진다는 날들이 지나가고 있지만 아직 유성우를 못보고 있다. 새벽녘에야 볼 수 있는건가? 보름달은 기울기 시작하고 스페인 시골마을에서의 야영은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 씻는건 중간 중간 만나는 알베르게에서 신세를 지고 있다. 다시 산길을 올라야 하니 추위에도 잘 대비해야만 한다.
[8.13 수요일 / 걸은지 27일째]
이제는 걷는것이 생활이다. 벌써 한달 가까이 스페인의 시골길을 걷고 있으니 원래 내가 하는 일이 이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한국에 돌아가서 틀에 박힌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걱정따위는 없다. 그냥 일어나서 맛있는 걸 사먹거나 요리해서 먹고 오래된 옛 성과 성당, 마을 골목길을 실컷 구경하며 걷는다. 행복감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런 생활을 평생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현실은 여행의 끝에서 그 큰 입을 벌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밤낮이 바뀌니 보이는 세상도 바뀐다. 지난밤 텐트위로 쏟아지는 물벼락 덕분에 늦잠을 잤다. 지나가는 순례자들의 수런거리는 소리와 발자국 소리에 깨어나니 벌써 해가 중천이다.
카카벨로스의 프로젝트 시장으로 들어가 브런치를 먹었다. 몇몇 업종의 상인들이 모여서 작은 시장을 형성한 곳이다. 마을길 동쪽과 서쪽에 있는 두 곳의 성당도 들렀다.
카카벨로스의 쿠와강 다리 건너에 공립알베르게가 있다. 쉬러 들어간 김에 세요(스탬프)를 받고 샤워와 빨래만 하고 길을 나섰다. 공립알베르게의 장점이다. 알베르게 가기 전 도로 우측에는 옛날식 와인 양조기계도 전시되어 있다. 이 곳 알베르게는 옛 성당 옆에 지어졌는데 객실이 2인1실로 되어 있고 시설도 꽤 괜찮은 편인 것 같다.
카카벨로스에서 비야프랑카(Villafranca del Bierzo)까지의 길은 무척 깨끗하고 아름답게 조성된 길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도로 우측의 비탈을 오르게 된다. 이 비탈을 오르다 보면 노게이라(Nogueira) 조각 스튜디오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조각공원을 만나게 된다. 노게이라가 조각가의 이름인지는 모르겠다. 그곳을 지나면 얼마지 않아 독특한 느낌을 주는 마을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다. 비야프랑카의 골목에는 터키식 케밥을 맛있게 하는 레스토랑이 있으니 맛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비야프랑카의 거리를 걷다가 아스토르가에서 잠시 만났던 프랑스인 지휘자 라이오넬과 마주쳤다. 그는 여기서도 호텔을 잡았단다. 금수저는 다르군.
비야프랑카는 정말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가운데 언덕 위로 중세의 성당과 건물들이 품격있게 자리하고 있다. 비야프랑카를 관통하면 순례길은 발카르세강을 따라 산을 휘감아 이어진 뒤 하늘 위로 뻗은 고속도로를 따르게 된다.
우리는 중간 중간 야영할 만한 곳을 지나쳐 가다가 결국 트라바델로까지 걷고야 말았다. 주위가 어두워졌고 시간은 이미 밤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스페인의 낮은 정말로 길다.
트라바델로에는 태극기를 걸어 놓고 라면을 파는 바르가 있다고 들었지만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는 발카르세강을 건너 농막이 있는 공터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주변에 버려진 나무토막이 많아서 까미노를 통틀어 가장 멋지고 따스한 모닥불을 피웠다.
우리의 캠프파이어 위로 기울어 가는 슈퍼문과 스페인의 유명한 맥주인 에스트레야(Estrella:별) 광고판의 불빛만이 빛나고 있었다.
썰렁하지만 와인과 모닥불 만으로도 즐거운 캠프파이어는 새벽까지 계속됐다. 아직 유성우는 못 보았다. 마을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이라 실컷 떠들고 노래할 수 있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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