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히 알면서도 내 발등에 도끼를 찍을 때가 있더라
청바지 입는 워킹맘
아이와 나의 평화로운 출근길.
아이는 불안한 기색 없이
어린이집 생활에 잘 적응했고,
나 또한 복직 후 회사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또한 매일 먼 거리를 출퇴근하느라 생긴
튼실했던 종아리 근육과
볼살 실종된 브이라인 턱선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음에 뿌듯했다.
그러나 평화가 너무 길었던 탓일까.
아니면 내 삶에 평화가 어울리지 않는 걸까.
마음 한켠에 떠올라서는 안 되는
금기의 단어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둘째'
미쳤다.
이제야 간신히 평화를 누리고 있는데
스스로 발등을 찍으려 하다니..
하지만 사람은 망각의 동물임에 틀림없으며,
스스로 발등을 찍는
어리석은 존재임에 틀림없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내 인생에 둘째는 절대 없다며
하나만 낳아 잘 키우고 싶다고
그렇게 떠들고 다녀 놓고는..
육아를 도와줄
시부모님, 친정 찬스 하나 없는 내가,
아이를 7시까지 어린이집에 두기 미안해
반전세라는 강수를 두면서까지
서울로 이사를 온 내가
둘째 고민을 한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둘째가 생기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알면서도
고민하고 있는 나..
결국 나는 배부른 몸으로 아이 손을 잡고
막달까지 회사를 다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나는 둘째를 낳았다.
발등을 찍은 것 치고..
둘째는 너무 예뻤다.
이래서 "둘째는 사랑"이라는 말이
있는 건가 싶을 만큼.
첫째 때 정신없어서 놓쳤던 순간들을
둘째 때는 놓치지 않고
눈과 마음에 차곡차곡 담았다.
비록 두 아이에 치여
매일 힘들고, 지쳤지만..
비록 2번의 육아휴직으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지만..
그래도 두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내가 포기한 것들이 아깝지 않았다.
후회나 미련, 아쉬움이 아닌
당연한 대가로 받아들여졌다.
가끔은 인생에서
뻔히 알면서도 내 발등을 찍을 때가 있다.
나에게는 그게 둘째 고민이었다.
머리로는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간절히 원하는 일.
어쩌면 도끼가 찍은 것은
내 발등이 아니라
이성의 끈일지도 모르겠다.
이사를 통해 겨우 여유를 찾은 지금
둘째로 인해 또다시 육아가 시작된다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자유, 승진, 경제적 여유 등..
그러나
이성적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성이 절대 이기지 못하는 그것,
바로 마음.
그때 내 발등을 찍은 덕분에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할 용기를 얻었다.
만약 내 이성의 끈이 건재했다면..
평생 맛보지 못했을 행복이었을 테니까.
"도끼야, 고맙다.
내 발등 찍어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