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윤 X TARL 락가 <해금, 노마드> in 페스티벌 풍류도원
푸르른 녹음이 한층 짙어진 7월 두 번째 토요일,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 영감을 받은 ‘페스티벌 풍류도원’이 김희수아트센터에서 열렸다. ‘향놀음-맛놀음-흥놀음’, 총 3단계의 한국 전통문화 기반 콘텐츠라 달가웠던 마음. 전통문화는 재미없고 따분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나? 시대 흐름에 맞게 재해석된 풍류의 세계는 남녀노소 다양한 방문객들의 오감을 사로잡았다.
오방색 실을 손목에 두른 뒤, 다른 한 손엔 부채를 쥐고 풍류도원 산책을 떠나봤다. 시트러스 향의 오일 한 방울을 떨어뜨린 부채를 부칠 때마다 몸에 달라붙어있던 더위도 서서히 날아가는 느낌. 아로마 테라피스트의 안내에 따라 8가지 키워드에 맞춘 블렌딩 오일을 체험하며 향놀음을 즐겨본다. 다음으론 소담한 주안상으로 맛놀음을 행할 차례. 여름을 잘 나기 위해 선조들이 마셨던 과하주와 5가지 핑거푸드는 미식의 기쁨을 일깨워 주었다. 마지막 대망의 흥놀음, 천지윤 X TARL 락가의 <해금, 노마드> 공연에서는 유랑이란 서사로 빚어낸 국악의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둥. 둥. 둥. 둥.’ 대지를 울리는 생명의 박동처럼 둔탁한 소리가 공간의 적막을 깨뜨린다. 이어 해금으로 선율을 그려내면서, 천지윤 X TARL 락가의 본격적인 공연 시작을 알리는 <Dream Road>가 선보여졌다. 아일랜드 고유의 켈틱 요소와 해금의 만남이 절묘하고, 신비로운 심상을 그려내기에 알맞았다는 생각. 동시에 강병무 사진작가의 사진과 영상을 보여주면서, 상상력으로 만든 초월적 세계에 시각적인 힘을 실어준다. 지금 당장 광활한 대자연 한가운데에 놓인 듯 몰입감을 높여준 장치로 작용했다는 점.
꿈의 여정에서 맞는 휴식. <숲속의 집>은 아련하면서도 안락한 자연의 정취를 담은 곡. 물이 흐르는 소리를 가르며 서정적인 해금 연주가 시작되고, 자유롭게 활개치는 음률이 묘한 긴장감과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원근감이 느껴지던 닭 울음소리와 새의 지저귐이 포개어지다 소멸하는 전개로 마무리.
이제, 열정을 보여줄 시간! 비정형적인 칠채 장단으로 정열적인 연주를 보여준 <칠리칠채>, 미래지향적 분위기의 <해금, 노마드>는 풍류도원에서 바라본 밤하늘을 상상하도록 만들었다. 장난감 피리와 에그 쉐이커를 사용해 발랄한 장난기를 보여준 <비트모리> 무대는 신명 나고 유쾌했다는 점. 또 다른 시작을 알리듯 앙코르곡 <Dream Road>로 공연의 끝을 맺었다.
세계 최초 해금 오케스트레이션이라니! 패드와 랩탑을 활용해 2명으로도 풍성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이 대단했지만, 그런 기술적 요소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무대에서 시작된 박수가 객석으로 번지고, 그렇게 기록된 소리가 모여 음악을 완성했던 순간! 공연의 주체와 객체가 소통하고, 더불어 예술가가 창조한 세계 안에서 객체가 주체로 전환되는 상황까지 목격했으니 말이다. 작업실을 옮겨 놓은 듯하면서, 많은 식물과 제각기 다른 모양의 조명들로 환상숲을 형상화한 무대 연출도 흥미로웠다. 이처럼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이상 세계는 멀리 있지 않으며 현실 안에서 무한히 존재할 수 있지 않은가.
“해금의 자유분방한 노님을 즐겨주세요. 의지할 데 없어 더욱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요.” 몽골 해부족의 악기였으나 고려 후기, 조선 시대를 거쳐 한국 악기로 변모한 해금. 명주실을 꼬아 만든 두 줄의 현악기인데, 허공에 떠있는 상태로 손과 귀의 감각을 이용해 연주해야 한다. 그런데 불안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다니? 천지윤의 신간 에세이 「직감의 동선」에서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책에는 꿈을 접는 것이 아닌 꿈의 트랙을 따라 달린 한 예술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는 삶과 여행, 음악과 글을 통해 나날이 새롭게 태어난다고 말한다. 게다가 오랜 시간 단련된 직감이 그를 이끌어주었을 테고. 이렇듯 한국 전통음악의 다양한 접근을 시도했던 그와 해금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작곡, 프로듀싱을 맡은 TARL 락가의 진짜 얼굴은 무엇일까. 개성 있는 옷차림에 최고 장인이 제작했다는 탈을 쓴 정체불명의 청년, ‘컨셉 하나는 확실하구나’란 생각이 들게 한다. 지금껏 본인이 해온 음악이나 여러 창작 활동으로 인한 편견 없이 다채롭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故 류이치 사카모토를 기리며 <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재해석한 무대도 뇌리에 스며들었다. 초반부 재즈적인 느낌과 후반부 락을 연상시키는 진행에 무엇을 지향하는지 드러났던 부분. 물은 아래로 흐르기 마련이며, 앞으로 이어질 행보와 영향력 역시 기대되는 자리였다.
다양한 문화와 사상이 섞여들었던 중앙아시아. 대초원에서의 유목민들은 땅을 경계 짓지 않는 삶을 살았다. 정착이 아닌 떠나기 위해 잠시 머무르며, 오히려 황폐해진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떠난다는 점. 이는 남의 마당에 있는 잔디가 더 푸르다고 느끼는 생각과 근본부터가 다르다. 초긍정주의를 뜻하는 ‘원영적 사고’가 유행하며 선한 영향력을 끼쳤듯, 노마드적 사고를 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고정불변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개방성, 사랑을 주고자 하는 마음.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에 얽매이지 않을 진정한 해방과 자유는 거기서부터 출발한다고 여기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