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페에서 친구를 만난다. 깔깔거리며 떠드는 친구의 표정만 봐도 에너지를 얻는 기분이다. 각자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양육하면서 정작 서로에 대해 얘기 나누는 것이 어색해진 40대의 아줌마들은 접시에 한 가지 음식만 듬뿍 담으면서 촌스럽게 뷔페를 즐긴다.
친구는 나보다 성적이 항상 좋았다. 선망의 대상인 SKY 대학교를 졸업하고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만한 대형 제약회사에 취직했다. 얌전히 대학원에 입학했던 나는 그 당시에도 여전히 이 친구의 소란스러운 수다를 경청하는 쪽이었다. 친구는 언제나 의식적인 대화 했다. “네가 사회생활을 아직 안 해서 모르겠지만 회사라는 게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야.”, “억지로 회식도 가야 하고 영업은 진짜 내 적성이 아닌 거 있지, 너는 모르겠지만". 웃는 표정으로 그래그래 하면서 수긍하는 태도로 이야기를 들었다. 속으로는 ‘날 무시하나?’, ‘그래. 본인이 좀 더 낫다고 여기면서 안정을 느끼네. 뭐가 저리 불안한 것일까?’ 생각했다.
우리는 참 달랐다. 친구는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하는 아이지만 세상은 되려 그녀에게 심심한 존재였다. 반대로 나는 그냥 그냥 대충 공부하고 세상 재밌는 것이 너무나 많은 아이였다. 사실 알고 있다. 그 친구가 진심으로 날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만 지고 싶지 않은 묘한 경쟁심을 17살 때 처음 만난 이후로 계속 나에게 투영하는 상황이라는 것도 안다. 알면서 들어준다. 친구이기 때문이다.
100% 마음에 드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60~70% 정도 통한다면 친구가 될 수 있다. 40~50% 정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무리 없이 함께 일할 수 있다. 사실 10%의 이해심도 발휘할 수 없는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난 친구의 수다를 아무 말 없이 받아들였다. 십 대 시절 함께 봉사활동하고 롯데월드도 가고 수능 100일 전 백일주도 함께 마신 그런 아이였으니까. 물론 그렇게 내뱉고 난 후의 현실 자각(현타)은 그녀의 몫이다. 분명 이 친구처럼 말하는 사람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나 자려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을 때 자신이 낮에 말한 몇 마디가 밀물처럼 머릿속에 밀려들 것이다. 뭔가 불만족스러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부끄러운 방패였다는 것도 알 것이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 불쾌함을 알기에 친구의 말을 그대로 둔다. 친구가 나에게 무례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나 역시 모두에게 예의 바르지 않기에 선을 넘지 않고 경계의 언저리에서 멈추었다면 친구이기에 들어주고 함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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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성정이 그다지 격한 사람이 아니다. 멍하니 가만있다가 코 베이기에 딱 좋다. 언제나 이런 내가 불만이었다. 나는 왜 좀 더 영리하게 행동하지 못할까. 심지어 ‘왜 그때 웃었을까. 좀 더 시크한 표정을 지을걸’ 하며 유치한 자책을 일삼기 일쑤였다. 하지만 마흔이 넘어 여유로워졌다. 다들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실로 의미 있는 것에 집중하는 법을 배웠다. 나의 심리학 스승 김영아 교수님은 언제나 말한다. ‘나 하나 바로 서자’ 정말 그렇다. 나에게 집중하게 되니 비로소 편안해짐을 느낀다. 덜 비교하고 덜 속상해한다.
아이를 양육할 때 오직 내 아이만 바라보라고 한다. 다른 집 아이와 비교하지 말라고도 한다. 이는 비단 아이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를 사랑함에 있어서도 나만 바라보면 된다. 완전(完全)한 나보다 온전(穩全)한 나를 꿈꾼다.
아직 나는 뷔페 식사 중이다. 친구가 파스타를 가져와서 휘휘 돌리고 있다. 소스가 어찌나 흥건한지 포크 사이에서 돌아가는 면발 위로 튀어 놀라 내 블라우스에 턱 하니 붙어버렸다. 친구는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여전히 포크짓에 열중이다. 슬며시 물티슈를 꺼내 친구가 알아채지 못하게 무심한 척하면서 소스를 슬쩍 닦는다. 속으론 어째서 소스가 상대방한테 튄 사실을 모를 정도로 둔감한 것인지 심히 궁금하지만 굳이 문제 삼지 않는다. “에잇! 튀었잖아!” 정도의 한마디도 아쉽지 않다. 블라우스는 빨면 그만이고 친구는 여전히 즐거워 보인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고 영화를 사랑하며 책을 아낀다. 혼자 있는 것에 안전함을 느끼고 넓은 관계보다 깊은 관계를 선호한다. 그마저도 타인보다는 나와의 깊은 관계를 더욱 애정한다. 까칠한 기준이 존재하며 살아가는 잣대로 사용한다. 하지만 타인에게는 굳이 까칠함으로 무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무심해 보일 수도 있다. 혹자는 내가 어렵다고 한다. 쉽지 않다는 말도 들어봤다. 그럼 난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이 나를 편함의 상대로 여기지 않아 그런 거지. 뭐가 필요해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가? 당신의 의도가 궁금하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뭔가 목적이 있어 접근하더라. 맞다. 이리 살짝 꼬인 면도 나에겐 있다. 대개 타인의 의도를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지만 문제 삼지도 않는다. 계획 세운 일이 틀어지는 것을 싫어하지만 많이 유해졌다. 커피를 좋아하며 은은하고 향기롭고 조용한 장소를 좋아한다.
나의 MBTI는 INFJ이며 아주 마음에 든다. MBTI가 나의 레이블이 될 수는 없겠지만 꽤 멋진 유형이라고 생각함에는 변함이 없다. 편안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만, 울타리를 치고 등을 진채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는 나는 모순덩어리 79년생 이름은 김승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