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cine x Design (not the MD you know)
의료업계에서 User Experience (사용자 경험; 이하 UX)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아니, 내가 경험한 바로는 거의 모른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아마 환자들을 위해서 서비스나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 정도 되어야 환자들의 UX에 집중하지 않을까 싶다.
근데 나는 의사가 환자의 경험에 관심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환자와 의사와의 신뢰를 다지기 위해서 의사는 환자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 미국에서는 한 환자를 보는데 평균 15분, 한국에서는 적으면 3~5분이라고 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 환자에게 온전히 모든 신경을 쏟는 것은 쉽지도 않고 그렇게 하다가 몸이 축 나니까 선배 의사들은 적당히 하라고 보통 조언할 것이다. 그러나 환자들은 이 '적당히'를 너무나 잘 안다. 이 의사가 나를 위해서 최선을 다 하고 있는지 거의 바로 안다. 아무래도 많이 경험해 봤기 때문일 것이다.
의사가 환자가 되어보면 입장에서도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환자 본인이 의사인 것을 밝히지 전까지 자신을 진료할 의사에게 본인은 그냥 대기자 73번이기 때문이다. 진찰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경험, 진찰을 받는 중에 듣는 이야기도 경험, 생각한 것보다 일찍 진료가 끝나는 것도 경험, 다시 예약을 하는 것도 환자의 경험이다. 모든 게 경험 투성이라면 의사는 환자의 경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게 옳은 것일까?
의대에서 학생들의 인성교육을 담당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니까 에세이든 인터뷰든 거르는 작업을 미리 하고 싹수가 있는 학생들만 고를 것이다. 그래도 현재 만나는 의사들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들도 다 이런 입시 과정을 거쳤는데 왜 아직도 내가 만나는 의사들은 똑똑하지만 사람을 대할 줄 모르는 걸까?
내가 의대를 다니면서 사람이 좋아서 의사가 된 학생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딱히 환자의 경험에 대해서는 딱히 관심이 없고 의사라는 지위가 가져다주는 명예나 돈 때문에 의대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왜 학교에서 고르고 고른 학생들이 생각보다 인간에게 관심이 없고 병을 고치는 일에만 신경을 쓸까?
환자에게 병고침이 일차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의사는 그러한 환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만약 버림을 받고 마음의 상처가 있어서 병원에 왔다면 그냥 상담받아야 할 것 같다고 정신과로 보내고 내 일을 이어서 하는 게 맞는 것인가?
아무리 바쁘고 일이 밀려 있다고 해도 의사는 결국 사람을 봐야 하는 직업이다. 중심에 사람이 없으면 언젠가는 의사로서의 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 사람은 과연 의사가 맞는 걸까. 병 고치는 기계와 다름이 없지 않은가.
의대에 입학하기 전에 UX 수업 하나를 들으면서 내 천직은 어쩌면 이 분야에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부서진 시스템을 고치기 위해서 무언가 바꾸어 나가는 것에 재미를 알아낸 나는 사람들의 경험에 대해서 조사하고 더 나은 경험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새로운 프로세스를 만들어 내는 것에 쾌감을 느꼈다. 그런 와중에 의대 입학은 내게 엄청난 절망을 안겨주었다. 내가 생각했던 환경과 사람들이 의대에 있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디든지 가도 사람들은 이기적인 집단을 이룰 수밖에 없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적어도 의사라면 사명감을 가지고 환자를 위해서 한 몸 불살라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나는 이 자리에 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무언가 더 잘해보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일단은 의사가 되고서나 생각하자라는 마인드가 팽배했다.
이게 맞아? 정말? 무엇 때문에 이렇게 어렵게 의대 온 거지? 이렇게나 시스템 적으로 고쳐야 할 것이 많은데 내 배가 부르고 등이나 따시면 되는 것이 맞는 건가?
의사들은 무너져 가고 있는 보험 체계와 의료 시스템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니, 모르면 안 된다. 자기 밥그릇이 없어질 수도 있는 마당에 관심이 없을 리 없다. 그렇지만 이거를 뜯어고치자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고 정치적인 영역으로 넘어가면 의사로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생각하니 그냥 내 자리에서 만족하면서 무언가가 바뀔 때까지 존버해야겠다는 생각을 당연히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딱한 환자를 보면 이런저런 부분들이 빨리 개선되어야 할 텐데 속으로는 탄식을 하고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큰 조직의 시스템을 고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속한 조직 안에서 거시적인 변화를 추구하기보다 미시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나를 돕는 이들과 환자와 그들의 보호자를 위해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 작은 배려를 찾는 것이다.
결국 의료 산업도 서비스다. 서비스를 하루 만에 통째로 바꿀 수 없다. 그렇다면 작은 배려가 쌓여서 작은 문화를 만들고, 작은 문화가 쌓여서 조직을 바꿀만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면 시스템을 바꿔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
환자의 경험을 바꾸는 일은 어쩌면 거창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환자에게 동일한 노력을 할 필요 없으니 그냥 그들에게 내가 의사로서 배려해 줄 수 있는 작은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 이를 프로세스화 시키는 것은 바로 좋은 디자인의 영역. 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참된 의사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이 아닌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