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ll we dance?

by 해진

오래전 영국에 살 때의 이야기다. 첫 번째 영국살이는 휴양도시 본머스에서 일 년을 보내면서 영국과 일반적인 영국사람들의 생활, 그리고 영국인들의 정원 사랑 등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두 번째의 2년 간의 영국살이는 내가 본머스에서 갈고닦은 경험을 그대로 영국살이의 재미로 접합시키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었다.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영시나 영소설에 대해 수박 겉핦기로나마 공부를 해서인지 영국이라는 나라는 나와 무관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곳에서 적응하는 것도 어려울 게 전혀 없었다는 것은 내게 커다란 축복이었다.


그전에 영어강사로 근무하며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영국으로부터 온 원어민 강사들과 근무시간 외에도 주말이 되면 그들을 우리 집에 초대하여 하루 종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서울과 서울 근교에 있는 이름난 곳들에 같이 놀러 다니면서 그들과 우정을 쌓아왔던 것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그런 쪽으로는 약간 돌연변이였다고 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뉴욕 출신의 미국인으로부터 "너는 뉴요커 보다 더 뉴요커 같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으니 그 말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유학파도 아니었던 내가 미국식 영어에 익숙해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당시에는 드물었던 원어민 영어선생님 메리와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미국식 영어를 잘 구사하셨던 나 ㅇ ㅇ 선생님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지금 생각해도 손색이 없는 영어실습실을 갖춘 학교를 다닌 것도 내게는 은근한 자부심을 심어준 것 같다. 그 언어실습실을 그렇게 자주 이용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덕분에 나는 평생 영어에 대한 관심을 놓은 적이 없기에 영국에 살면서 영어 때문에 곤란을 당한 적은 거의 없었고 그래도 영어 사용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크고 작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한인들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주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의 미국식 영어 발음 때문에 소수의 영국인들로부터 "Are you an American traveller?"이라는 질문을 몇 번 받은 적은 있긴 하다.


이 스토리는 "해진의 영국살이"의 에필로그로 쟁여두고 있었는데 그 당시 17회의 연재가 내게 벅찼었던지 그냥 에필로그도 없이 독자들에게 대충 연재를 끝내겠다는 인사와 함께 그 연재를 끝내게 되어서 그래도 지금이라도, 그 미안한 마음을 풀어 보려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가족이 런던에서 가까운 뉴몰든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을 꿰어찿을 무렵이었다. 1년의 영국살이가 좀 부족하다고 느낀 나는 다시 영국에 가기 위해 또 한 번 새로 장만한 살림살이를 모두 엎으려 했었다. 첫 번째 출국 때에는 10년 이상을 쓴 세간살이들 이어서 미련 없이 다 던져 버리고 영국에서 돌아오면 다시 장만하자는 각오였었지만 두 번째 출국은 그런 각오로 영국살이를 마치고 돌아와서 집도 리모델링을 하고 세간살이도 다 새로 장만한 것들이어서 영국행을 다시 결정한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처럼 느껴졌다.


나는 궁여지책으로 그 당시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방책을 내놓았다. 가구와 함께 집을 세놓는 것이었다. 다행히 남편은 강남에서 건축설계사무실을 운영하고 부인은 서울 모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었던 예비부부가 우리 집의 위치와 가구등 세간살이를 마음에 들어 해서 우리 집에 입주하기로 했다. 결혼 전에 우리가 내놓은 전셋집을 얻어 놓고 결혼식을 한 케이스다. 나중에 우리 집에서 사는 동안 토실토실하고 귀여운 아들을 낳았을 때 우리도 함께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뉴몰든에 도착해서 우리의 두 번째 영국살이는 별 어려움 없이 잘 진행되어 갔다. 앞뒤 정원이 딸린 예쁜 이층 집을 얻는데도 본머스의 집주인 클라이브가 너무나 훌륭한 추천서를 써주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 신도인 우리 가족이 뉴몰든 하이스트릿에 있는 여러 개의 교회 중에 어떤 교회를 나가느냐 는 것을 정하는 것이었다. 남편은 본머스에서 살 때 영국교회에 잘 적응하며 일 년 동안 다녀 보았는데도 이번에는 굳이 한인교회를 나가겠다고 했다. 일단 그러라 하고 나는 본머스에서 그리하였던 것처럼 다시 나 홀로 교회 탐방에 나섰다.


우리 집과도 가깝고 해서 일단은 하이스트릿에 위치하고 있는 뉴몰든 메소디스트 처치(New Molden Methodist Church)로 정했다. 그 당시의 그 교회는 성도들이 백 프로 백인들로 구성된 교회였다. 어떤 한인이 그곳에서 인종차별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는 소문도 있긴 하였지만 다니던 그 교회에서 나온 이유가 알고 보니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였다.


아무튼 나는 그곳에서 주일학교 교사와 함께 아이들을 위한 봉사도 하고 그 교회 소속 Moms & Toddlers라 봉사 단체에서 장난감 대여와 엄마들과 소통하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이들을 무척 좋아하는 내 적성에 딱 맞는 일이었다. 이러구러 1년 정도가 지나니 교회 성도들과도 익숙해져서 주일 외에도 같이 다닐 수 있는 영국인 친구들도 생겼다.


그즈음 해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 아시겠지만 영미권의 사람들의 추수 감사절은 부활절, 크리스마스와 함께 기독교 3대 명절 중 하나에 속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역사적 배경이 존재하지만 중요한 것은 말 그대로 추수를 감사하는 날, 즉 우리가 일 년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농축산물뿐만 아니라 모든 일용할 양식과 살아가면서 풍성하게 받은 모든 은혜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날이라고 보면 그리 틀리지 않겠다.


에고, 웬 사족이 이렇게 길꼬. 이제야 주인공이 등장하려고 하네. 그 당시 그 교회의 목사님은 키가 훌쩍하게 크고 몸이 탄탄하신 데이비드라는 이름을 가진 전형적인 영국인의 용모를 지닌 분이었다. 그날 우리는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예배 후에 진행하기로 한 추수 감사절 댄스파티 때문이었다. 흥겨운 음악이 흐르면서 대예배실은 순식간에 댄스홀로 바뀌었다. 한 입에 털어 넣을 수 있는 여러 종류의 핑거 푸드와 음료수들이 한쪽 구석에 준비되어 있었고 이제 막 시작 된 댄스파티였지만 마음은 모두 한껏 부풀어 있었다. 데이비드 목사도 예배를 주도할 때 입었던 검은 사제복을 벗어서 내려놓고 설교단 위에서 내려왔다. 이는 본격적인 댄스파티가 시작된다는 의미가 되기도 했다.


데이비드 목사가 첫 파트너로 누구를 택할까 모든 성도들이 궁금해하던 찰나에 목사님은 내가 앉아 있던 의자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순간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두 손을 교차하여 나의 양팔을 꽉 잡고 있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이 많은 여자 성도 중에 "설마 나랴" 했었다.


하지만 데이빗목사는 내 앞에서 딱 멈춰 서더니 내 눈을 직시하며 "Shall we dance?"라고 말하면서 손을 내미는 게 아닌가. 부드럽고 상냥한 웃음과 함께. 남자와 춤을 춰 본 적이 없는 내가 그때 기껏 한 소리는 나는 춤에 서툴러서 목사님의 발을 밟을지도 몰라요였다. 그러자 데이비드 목사는 내가 잘 리드할 테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요라고 조용히 속삭이듯이 말했다. 나는 어쩔 수 없다 싶어 데이비드 목사의 댄스 신청에 예스라며 응했지만 파트너 체인지가 있기까지 나는 갑자기 일어난 해프닝에 정신이 없었다. 중학교 시절 무용 시간에 왈츠와 미뉴엣은 기본으로 익혔다 해도 그간의 세월이 짧지는 않았기에 스텝이 꼬이지 않을까 조바심을 했었다. 그래도 댄스를 하는 동안 그의 발을 밟는 참사는 면했다.


사실 댄스파티에서 데이비드 목사의 첫 파트너가 되었다는 것은 그렇게 큰 의미를 둘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것이 영국이란 나라에 와서 내가 처음 경험한 댄스파티의 첫 파트너가 데이비드 목사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별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처음이라는 경험은 이렇게 마음에 깊이 새겨지나 보다. 지금도 가끔 외국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댄스파티를 보면 그때 내가 간직하고 있던 첫 댄스의 기억들과 오버랩되는 것을 보면 데이비드 목사와의 춤이 예사로운 추억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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