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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홈즈 Jun 15. 2021

겨? 아녀?

시인 이정록

겨? 아녀?]

언제부턴가 명절이 싫어졌고 언제부턴가 뭔 기념일이 싫어졌고 언제부턴가 내 생일도 별루 더라고 젠장 인생을 잘 못살아서 그런 거것지 뭘 지대로 누려봤어야 축하든 뭐든 받는 게 자연스럽지 생각해보니 참말로 이놈에 인생 그지 같다는 생각도 들어 주변에서는 나더러 한량처럼 재미지게 사는 양반이라구들 허지만 실상 따지구 들어가 보믄 별거 읎다니께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뭘 겨? 아녀?

(시인 이정록의 시를 오마쥬 하여 술 취한 김에 어쩌고저쩌고 설라므네~~)


이게 다 이정록 시인 때문이다]

난 시인 이정록을 잘 모른다. 어느 날 내 페친이 되어 그의 시(글, 사람)를 알게 되었다. 프사를 보니 딱 동네형 스타일이다. 실제 그는 우리 고향 청양 옆 동네 홍성 사람이다. 그를 잘 모르지만 그의 글을 통해 시인 이정록을 본다. 그의 시(글)는 딱 우리 동네 충청도 스타일이다. 툭툭 던지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웃기기도 하고 뭔가 생각하게 만든다. 충청도 정서를 이리 잘 표현하니 참으로 훌륭한 솜씨다. 글쟁이 코스프레도 이제 못하겠다. 하튼 이 양반 참 멋지다.


참 빨랐지 그 양반

      -이 정 록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녓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년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이정록 시집 '정말' 중 ‘참 빨랐지 그 양반’ 전문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울 아버지 생각이 난다. 참 빨리도 가셨는데 난 빨리 가신 것 보다 8남매 중 6섯째인 나를 그 작은 단칸방에서 어찌 맹그셨나 생각하다가 이 시를 읽어보니 내가 음력 5월생이니 ‘아 나도 밀밭 출신…. ‘울 아부지 참으로 대단하셔’ 이런 생각을 절로 들게 한다. 헌디 하필 울 엄니는 날 그렇게 맹글어 놓고 내 생일 전날 돌아가셔서 이제 난 평생 엄니 제사 담 날을 내 생일로 짊어지고 가야는구나 생각하니 시인 이정록 선생이 자꾸 아른거리고….

그류 오늘이 내 생일이라 구유.


#이정록
#참빨랐지그양반
#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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