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보다 일본이 더 싫은 미얀마인들의 속내

안 보면 후회할 미얀마의 대표 얼굴, 다섯 번째 - 삔우린

by 청년홈즈

'창경원'에 벚꽃놀이 가자.’

이 말 들어본 사람은 분명 40대 이상이다. 지금은 잘 복원되어 주말이면 젊은 연인들과 많은 외국인들이 대여한복을 입고 거닐며 유구한 조선의 역사와 왕궁의 멋스러움에 빠져 감탄하는 창경궁에는 나라를 빼앗긴 왕조의 치욕이 들어 있다. 불과 35여 년 전까지 5백 년 조선왕조의 왕궁 창경궁은 궁이 아니라 코끼리·사자·호랑이 등 온갖 동물들의 분뇨가 가득한 동물원으로 전락해 있었다. 특히 벚꽃이 흐드러지게 춤을 추는 봄이면 이곳은 왕궁이라기보다는 그저 행락객들이 들끓는 유원지일 뿐이었다.


창경원은 원래 수강궁이라 하여 조선 세종 원년에 상왕이었던 태종이 거처하던 곳이었다. 그 후 성종 때 대궐을 증축해 창경궁이 되었다. 일제는 조선 왕조의 혼이 깃든 이 고귀한 왕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짓고 그곳에 수백 그루의 벚나무를 심어 왕조의 역사에 치욕을 주었다.

경술국치 1년 전인 1909년의 일이다.


망국의 한을 담은 조선의 왕궁 창경궁은 창경원(동물원)으로 전락해 해방이 된 후에도 한참 동안 복원되지 못하고 행락객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곤궁한 나라 살림에 미쳐 왕궁 복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또다시 냉전이데올로기에 휘말려 좌우, 남북으로 갈라져 싸우다 분단의 시대를 맞이한 탓도 있었다. 해방 후에도 한참 동안 봄이면 일제가 심어 놓은 벚꽃을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사람들은 식민의 치욕도 잊은 채 '창경원 벚꽃놀이'를 즐겼다. 이런 부끄러운 역사는 1984년 서울대공원으로 동물원을 옮길 때까지 계속되었고, 1986년에야 복원되어 창경궁이라는 제 이름을 다시 찾게 되었다.

삔우린.jpg ▲ 삔우린의 깐도지 호수 공원 :미얀마 사람들이 제일가고 싶어 하는 휴양지 중 한 곳이다
삔우린1.jpg ▲ 깐도지 호수 정원 1년 내내 각종 꽃들이 만발하는 곳이다.

미얀마의 창경원 삔우린-식민지 시절, 외세가 만든 화사한 유원지
삔우린(Pyin Oo Lwin)은 미얀마 사람들이 제일가고 싶어 하는 휴양지 중 한 곳이다. 만달레이에서 북동쪽으로 60여 km 떨어져 있고 해발 1000여 m의 고원에 조성된 이곳은 고온 다습한 미얀마 기후와는 전혀 다르게 1년 내내 쾌적하고 맑은 공기로 휴양지에 적합한 곳이다.

미얀마 현지인들은 이곳을 '꽃의 도시"라는 의미로 빵묘도(Panmyodaw)라고 부른다. 1년 내내 각종 꽃과 과일, 향이 좋은 커피 등을 맛볼 수 있다. 삔우린은 과거에 메묘(Maymyo)라고 불렀다. 영국군 장교인 메이(May) 대령이 살던 마을(묘 myo)이라는 뜻이다. 이름 속에 들어 있듯 이곳은 영국 신민지 시절 영국군이 자신들의 점령지에 건설한 휴양도시다. 시내를 돌다 보면 아직도 영국풍의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어 식민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삔우린2.jpg ▲ 깐도지 호수 공원(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 공원 내에는 잘 가꾸어진 각종 나무들, 향이 좋은 아라비아 커피 농장, 규화목 박물관, 공중 산책로 등이 있다.
삔우린9.jpg ▲ 깐도지 호수 공원: 미얀마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는 휴양지

시내 남쪽에는 삔우린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호수 공원 국립 깐도지 정원(National Kandawgyi Garden)이 있다. 이곳은 1년 내내 각종 꽃들이 만발하고, 잘 가꾸어진 각종 나무들, 향이 좋은 아라비아 커피 농장, 공중 산책로 등이 있는 상당히 잘 보존된 공원이다. 대충 둘러봐도 2시간 이상 소요되는 넓은 정원으로 안에는 이곳 특산물인 규화목(나무화석)들을 전시해 놓은 규화목 화석박물관도 있다. 수만 년 역사를 간직한 채 여기저기 서있는 거대한 규화목들을 보니 잠시 시간여행을 온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며 나는 뜬금없이 한때 동물원으로 빼앗겼던 조선의 왕궁 창경궁이 떠올랐다. 이 좋은 곳에 와서 아픈 우리 역사를 떠올리는 내가 유별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괜히 가이드한테 이곳 역사를 들어 가지고’ 잠시 자책도 해봤다.

허나 어쩌랴! ‘역사란 지운다고 없어지는 것도, 잊고 싶다고 잊어서도 안 되는 것임을..’

삔우린6.jpg ▲ 깐도지 호수 공원:잘 가꿔진 정원을 거닐며 문득 이곳에 식민의 아픔이 있음을 생각했다.
삔우린5.jpg ▲ 깐도지 호수 공원: 잘 가꿔진 정원

미얀마 식민의 역사... 우리나라와 겹쳐 보인다
대부분 동남아시아 국가가 그렇듯 미얀마의 근대사에도 아픈 식민지 역사가 들어 있다. 만달레이 시내 한복판에는 제국주의 힘에 의해 사라진 미얀마 마지막 왕조 ‘꼰바웅 왕조’의 한이 서린 만달레이 왕궁이 자리 잡고 있다. 사방이 거대한 해자로 둘러싸인 왕궁을 보면서 잃어버린 우리의 조선왕조가 투영되어 들떠있던 여행자의 마음도 가라앉았다.

미얀마 근대사는 영국 신민의 역사로 시작되었다. 1855년 미얀마의 마지막 꼰바웅 왕조는 만달레이 왕궁을 에워싼 영국군에 항복하고 마지막 왕 ‘띠보’는 인질이 되어 인도로 끌려갔다. 마지막 왕조를 무너뜨린 영국은 미얀마를 인도의 한 주로 편입시키고 수많은 인도인과 중국인들 대거 유입시켰다. 그리고 다수의 버마족을 견제하기 위해 친족·까친족 등에게 힘을 실어 주고 라카잉 주에 기독교 선교활동을 지원하여 종족 간 갈등을 조장했다. 이러한 영국 식민지 정책의 후유증은 현재까지도 종족 간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로힝야족에 대한 방화, 강간, 학살 등으로 이어지는 인종청소에 가까운 갈등은 국제적 문제로 해결이 시급하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 아웅산 수치는 2015년 민주주의 민족동맹(NLD)을 이끌어 의석을 석권하고 2016년엔 측근을 대통령에 당선시키며 사실상 정권을 잡았다. 이에 국제사회는 이 문제 해결에 기대를 걸었으나 수치는 오히려 군부의 만행을 옹호하고 유엔 인권이사회 조사 결의안도 거부하고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쏘아붙여 국제사회에 실망을 안겼다. 학살은 어떤 이유로든 인류사회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국제사회는 좀 더 적극적 개입과 관심으로 로힝야족 문제가 하루라도 빨리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삔우린3.jpg ▲ 깐도지 정원 안내판 삔우린의 아픈 식민의 역사, 이곳은 영국 식민지 시절 영국군의 휴양도시였다.

미얀마에는 아픈 식민의 역사도 있지만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의 역사도 있다. 1930년대 들어 미얀마의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선 사람이 바로 아웅 산 수치 여사의 아버지인 아웅 산 장군이었다. 아웅 산 장군은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하고자 일본과 손잡고 영국군과 싸워 물리쳤다.


하지만 일본은 제국주의 속내를 드러내며 미얀마 곳곳을 폭격하고 미얀마를 점령한다. 또다시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 기간은 영국보다 짧은 기간이었으나 훨씬 악랄하게 핍박해, 미얀마인들에게 분노와 치욕을 느끼게 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으로 죽였고 많은 미얀마 여성들을 위안부로 강제 동원했다.


영화로도 제작된 '콰이강의 다리'는 일제 식민지 수탈의 잔혹성을 대변하는 현장이다. 수많은 미얀마 사람들과 영국군, 네덜란드 포로들이 동원되어 가혹한 노동 끝에 사망했다. 현지 가이드 말에 의하면 미얀마 사람들은 지금도 영국인보다 일본인에게 더 호의적이지 않다고 한다.

미얀마 곳곳을 여행하면서 느낀 점은 미얀마 사람들은 식민의 역사를 결코 쉽게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미얀마 독립의 영웅 아웅 산 장군에 대한 존경의 마음은 거의 신격화 수준이다. 미얀마 곳곳에는 아웅 산 장군의 이름을 딴 지명이나 거리, 공원이 있으며 집집마다 아웅 산 장군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니 아직까지도 많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제대로 된 평가도 받지 못한 채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현실과 비교되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매국의 더러운 자양분을 먹고 자란 대부분 친일파 후손들은 자기반성도 없이 오히려 기득권 세력이 되어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우리 현실을 생각하니 속이 터질 지경이다.

얼마 전 TV 뉴스에서 등 짝에 선명하게 ‘서북청년단’이라고 박힌 조끼를 입고 시위하는 무리들을 보았다. 이곳이 100년 전 대한민국인지, 우리는 진정 해방을 맞이 한 것인지, 여러 생각이 복잡해지며 속에서 천불이 끓어올랐다. 서북청년단이 어떤 짓을 했는가? 어렵게 이룬 해방조국에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해 설치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기 위하여 제헌국회에 설치되었던 특별기구) 해체의 주범 아닌가?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하면 과오는 반복된다는 진리를 새삼 깨달으며 TV를 꺼버렸다.

삔우린4.jpg ▲ 미얀마 독립의 영웅 아웅산 장군 길거리 노점에서 파는 아웅산 장군 관련 책

더욱 노골화되어 가는 일본의 우경화도 마찬가지다. 아베 정권부터 더욱 노골화된 일본의 우경화는 스가, 기시다 후지오 총리를 이어가며 식민의 역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군국주의 부활을 준비하는 듯한 행보를 하고 있다. 일본의 많은 정치인들은 여전히 해마다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 전범들을 추모하고, 수많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여전히 사과는커녕 조롱으로 일관하고,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도 불구하고 배상은 고사하고 오히려 그것을 빌미로 일방적 수입금지 조치를 내리며 우리를 무시했다. 파렴치한이 따로 없다.

제대로 된 친일역사에 대한 평가와 반성 그리고 친일잔재 청산 미흡이 불러온 아픈 현실이다. 벌써 해방 70년이 넘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당장 친일잔재를 청산해야 한다. 국가는 아직도 머나먼 타국에서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찾아 송환하는 일에 더욱 매진해야 한다. 또한 여전히 타국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찾아내어 온당한 대우를 해주길 바란다.


좋은 곳 다녀와서 좋은 기억으로 쓰는 여행담인데 아픈 우리 역사가 들어가니 정말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글이 심각해지고 재미없어진다. 그럼에도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역사는 잊고 싶다고 잊어서는 안 되며 지운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제 곧 봄이다. 다시 찾은 우리의 왕궁 창경궁에도 봄은 흐드러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아픈 일제 식민의 상처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미얀마 삔우린 아름다운 꽃밭 속에 여전히 식민의 아픈 역사가 숨어 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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