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할아버지를 만나다
할아버지]
'조선의 마지막 선비, 유학자, 학자, 한문책들, 백자 연적, 벼루, 사탕, 갓과 도포, 장날, 계란 한 줄, 술...'
할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들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초등) 1학년인가 2학년 때 돌아가셨다. 죽음, 슬픔이 뭔지 모르던 꼬맹이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갑자기 먹을 것이 많아져서 그저 좋았던 기억이 있다. 동네 어른들이 시끌벅적 상여놀이하던 것도 생각나고, 한문으로 쓰인 만장들이 동네 한 바퀴를 돌 만큼 끝없이 따르던 광경도 선명하다.
"석근아~ 석근아"
술 드시면 울면서 부르던 일본으로 유학 갔다던 둘째 큰아버지를 부르던 모습도 기억난다. 일본 교토대로 유학 보냈던 집안의 희망이었던 둘째 큰아버지는 전쟁 말기 귀국하겠노라 편지 이후 행방불명 되었다. 그 뒤로 할아버지는 장날마다 아침나절이면 계란 한 줄을 들고나가 저녁때가 되면 동네가 떠들썩 해질 만큼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왔다.
원래 명절 전에 해오던 벌초를 더워도 드럽게 더웠던 올해에는 추석이 지나 엊그제 주말에 했다. 벌초 후 오랜만에 고향 집 청소를 하다가 골방에서 할아버지 사진을 발견했다. 방구석에 처박혀 구겨지고 더럽혀진 사진을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할아버지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춤을 췄다. 내 삶에 겨우 8~9년 살다 간 할아버지지만 끝없이 할아버지의 역사가 펼쳐졌다.
문득 언젠가라는 때는 오지 않는다지만 할아버지의 역사를 한번 쓰고 싶어졌다. 하긴 아버지, 어머니 역사도 아직인데 그 언젠가가 오리오마는.
사진 속 할아버지는 여전히 눈이 살아 있다.
나의 할아버지 전영섭(복원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