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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Feb 04. 2019

호흡과 고요와 당신의 속도

돌로미티, 이탈리아


어린 시절, 아버지는 산에 오르는 걸 좋아하셨다. 그리고 나는 다른 또래 아이들이 그러하듯 산에 오르는 걸 싫어했다. 가뜩이나 가기 싫은 산행에 느려진 내 걸음으로는 아버지의 걸음을 따라잡기 버거웠다. 그 속도의 차이만큼 아버지와 나 사이의 거리는 벌어지기 마련이었고, 벌어진 거리만큼 나는 산과 멀어졌다.


파리를 시작으로 한 두 달간의 자동차 여행이 끝나갈 무렵, 이탈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알프스 돌로미티(Dolomites)를 향했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구역만해도 서울 면적의 2배가 넘는 곳. 그 속에 자리 잡은 3천 미터가 넘는 18개의 봉우리와 수백 개에 달하는 트래킹 코스. 그 돌로미티를 향하는 우리의 짐 속엔 튼튼한 등산화 한 켤레, 장갑과 스틱 하나 들어있지 않았다. 그만큼 산을 오른다는 건 나와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고, 나는 산을 오르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Pozza Di Fassa, 돌로미티, 이탈리아 | 17.07.03

볼로냐에서 4시간 남짓 달려, 돌로미티 동쪽에 위치한 마을 코르티나 담페초 근처 캠핑장에 도 착했다. 아직 여름날의 해가 떨어지기 전이었지만, 구름 뒤로 해가 숨을 때면 제법 쌀쌀해 외투를 걸쳐야 했다. 텐트를 설치하고, 짐을 정리하고 나니 그제야 캠핑장 뒤편에 자리 잡고 있던 높은 산봉우리가 눈에 들어왔다. 비로소 돌로미티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프라그세르 호수, 돌로미티, 이탈리아 | 17.06.30

돌로미티의 사람들


이튿날 아침 간단히 요기를 하고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캠핑장을 나섰다. 도시를 여행할 때와는 다르게, 자연 속을 여행할 때면 하루를 일찍 시작하게 된다. 억지로 아침형, 새벽형 인간이 되려 하지 않아도, 여행자의 몸은 머무는 곳에 흐르는 시간을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때마침 유럽 바캉스 시즌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유독 가벼운 차림으로 산책을 즐기는 가족 단위의 여행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반려동물과 함께 느긋하게 호수 주변을 걷는 것이 그들이 돌로미티를 즐기는 방식이었다. 정신없이 아버지를 쫓아 산을 오르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는 다른 모습에 당황스러웠다.


여행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유명한 장소들은 어떤 방식으로 그곳을 만나야 하는지 정답이 넘쳐난다. 그 정답이 모든 사람에게 맞을리 만무함에도 그것이 '진정한’ 여행인양 외치는 목소리 앞 에서 나는 할 말을 잃곤 했다. 가벼운 차림으로, 단단히 장비를 갖추고. 두 발로, 자전거를 타고, 차를 타고. 묵묵히 걸으며, 가다 서며, 가만히 앉아 바라보며. 각자의 방식과 속도에 맞추어 돌로미티를 향유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동안 느끼던 묘한 압박감에서 자유로워졌다.



프라그세르 호수, 돌로미티, 이탈리아 | 17.06.30

프라그레스 호수


우리 속도와 방식대로 돌로미티를 둘러보기로 하면서 우리는 주로 돌로미티 곳곳에 위치한 호수들을 찾았다. 호수 근처까지 차로 이동해, 주변을 산책하며 호수에 머무는 게 우리 호흡에 적당했다. 캠핑장에서 가장 가까운 미주리나 호수를 지나치는 건 하나의 일과와 같이 되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운무 덕분인지 여러 번 찾아도 매번 다른 풍경을 보여주었다. 우연히 만난 도비아코 호수에서는 진한 옥색 수면 위에 비치는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한참을 머물기도 했다.


여러 호수 중 프라그세르 호수는 유독 다른 세계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주차장을 지나 비교적 좁은 길목을 거쳐 들어가면 빼곡한 산맥으로 둘러싸인 프라그세르 호수를 만나게 된다. 주차 장의 북적거리는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고요함 속에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 바람이 물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 온다. 그래서인지 호숫가 주변에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가만히 누워 그 고요함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프라그세르 호수, 돌로미티, 이탈리아 | 17.07.02

호수 한 켠에는 이탈리아 유명 드라마에 배경이 되었다는 나룻배 선착장이 있었다. 드라마 때문인지 노를 저으며 호수를 둘러보는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힘껏 노를 젓던 사람들은 호수 중간 즈음에 도착하여 배를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곤 했다. 노 젓는 소리가 멈추고 찾아오는 잠깐의 정적을 상상해본다.


그 순간만큼은 저 호수 위에 떠 있는 나룻배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세계였다.



라가주오이 산장, 돌로미티, 이탈리아 | 17.07.02

라가주오이 산장


코르티나 담페초에서의 나흘 동안 돌로미티와 조금씩 가까워졌다. 이제는 좀 더 높은 곳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싶었다. 트래킹 코스가 잘 조성된 만큼, 거점이 되는 산봉우리에는 저마다 제법 유명한 산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중 라가주오이 산장은 돌로미티 동부에서 서부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잡아 우리에겐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곳이었다. 캠핑장을 떠 나기 전날 전화하니 운이 좋게도 딱 2인실 하나가 비어있다고 했다. 보통이면 몇 개월 전에 예약이 차는 곳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뜻밖에 찾아온 행운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높이 2,105m 팔자레고 고개 정상에 위치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리프트를 타고 650m를 더 올라가서야 라가주오이 봉우리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산장에 도착했다. 산장 테라스에는 사진가들 여럿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 시야가 좋진 않았지만, 언제 걷힐지 모르는 구름을 바라보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방에 짐을 풀고 레스토랑으로 내려오니 방 번호에 따라 자리가 지정되어 있다. 저녁 식사를 기다리며 구름이 걷히길 바라본다. 구름이 약간 걷히는 것 같으면 밖으로 나가 시야를 확인했다. 높이 2,752m의 산속에서 맞는 저녁은 제법 추웠고, 밖에서 오래 버티고 있기는 쉽지 않았다.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진가들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해가 지기까지 끝내 구름은 시원스레 걷히지는 않았다. 돌로미티의 탁 트인 풍경을 담기 위해선 다음 날 아침을 기약해야 했다.


라가주오이 산장, 돌로미티, 이탈리아 | 17.07.02

알람은 울리지 않았지만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5시 40분. 아내를 깨웠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외투와 카메라를 챙겨 홀로 밖으로 나갔다. 산장은 떠오르는 해를 등지는 위치에 있었기에 사진가들은 하나 둘 전망이 좋은 곳을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어제 오후 내내 주변을 가득 메우던 구름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탁 트인 돌로미티를 마주할 수 있었다. 사방 어딜 봐도 웅장한 산맥들이 시야를 가득 메우자, 도리어 어느 곳을 사진으로 담아야 할지 막막해졌다. 바라보는 것을 다 사진에 담아낼 수 없다면, 적어도 이 장면을 아내와 함께 바라보고 싶었다. 방으로 돌아가 아내를 깨우고, 함께 아침 산책을 나섰다.



카레짜 호수, 돌로미티, 이탈리아 | 17.07.03

카레짜 호수


처음 돌로미티를 가기로 결정할 때 마음을 움직인 건 카레짜 호수의 풍경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한 장의 사진 안에 새벽녘의 푸르스름한 호수와 주위를 둘러싼 빼곡한 나무, 그 뒤로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함께 담겨있었다. 돌로미티의 일정이 끝나갈 무렵의 오후 카레짜 호수에 도착했다. 사진 속 호수에서는 왠지 모를 처연함이 느껴졌지만, 한낮의 태양 아래 호수는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느긋하게 호수 주변을 둘러보는데 걸리는 시간은 30분 내외. 그동안 지나쳤던 호수에 비하면 매우 작고 소박한 크기의 호수였다.


호수를 한 장면에 담고 싶었다. 주변으로 난 산책로에선 호수가 충분히 담기지 않아, 산책로 바깥 비탈길을 오르다 한 소년과 마주쳤다. 혹시라도 미끄러져 카메라를 놓칠세라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와 달리, 소년은 비탈길을 놀이터인 양 자유롭게 누비고 다녔다. 심지어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앉아 산책로에 있던 엄마에게 카메라를 건네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소년이 담은 호수의 모습이 궁금했다.


산책로 주변을 돌면서 소년의 엄마와 자주 마주쳤다. 가만히 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면, 그곳엔 자유롭게 숲 속을 뛰어다니고 있는 소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호수의 반대편에서 이들을 만났을 땐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곳, 엄마는 연인과 함께 사랑스러운 눈빛을 주고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옆에 소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은 지루해 보였지만, 그 순간을 방해하지 않고 묵묵히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프라그세르 호수, 돌로미티, 이탈리아 | 17.07.02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고 멈춰 서는 것. 어린 시절 산을 오르던 아버지가 날 위해 멈춰 주었다면, 산과의 거리가 한뼘 더 가까워졌을까. 기억을 헤집어보니 좀 더 어린시절, 아버지와 함께 산을 오르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아마 더 차이가 났을 걸음인데도, 나는 아버지와 함께 걷고 있었다. 기억 속 아버지는 때때로 멈춰서 나무와 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야기들이 지겨워졌고, 결국 아버지의 멈춰선 걸음을 밀어낸 건 나였다.


돌로미티에서의 일주일, 어쩌면 나는 또 하나의 산을 오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 산을 오르는 내 걸음을 발견하고, 함께하는 걸음에 내 걸음을 맞추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돌로미티를 떠나는 날, 이번 걸음에 다 둘러보지 못하고 남겨둔 곳들이 하나 둘 마음에 자리 잡았다.


어느새 나는 이 고요로, 아내의 호흡에 나를 맞추며, 우리만의 속도로 다시 산을 오르고 싶었다.

(좌) 팔자레고 패스, 돌로미티, 이탈리아 | 17.07.02    (우) 도비아코 호수, 돌로미티, 이탈리아 | 17.07.02
<ARTRAVEL TRIP.26  'SILENCE'>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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