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마음을 나누는 관계의 비밀

일만 나누고 마음은 나누지 않는 관계에 대하여

by 제이린 Jayleen


저희 부서는 E 성향의 부서장을 필두로, 일 자체를 보상처럼 여기는 적극적인 직원들이 모여 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루는 편입니다.


일에 있어서만큼은 서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회사 밖에서의 그 사람에 대해선 사실 잘 알지 못하죠.

요즘 같은 시대에 개인적인 얘기를 묻지 않는 건 예의이고, 굳이 먼저 꺼내지 않는 것도 배려니까요.


저는 이게 적당한 거리이자 건강한 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달 초, 부서 내 몇 명과 함께 지방으로 워크숍을 가게 되었습니다. 부서에서도 주요 이슈들을 논의하던 사람들이었죠.

부서장은 간부들과 함께 저녁자리를 가졌고, 저는 후배 두 명과 따로 펍에 들렀습니다. 점심에도 업무 이야기를 꽤 나눴던 터라 저녁 자리에서는 대화가 자꾸 제자리를 맴도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 문득 '지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멀리 외따로 나온 출장이라는 특수한 상황, 내가 신뢰하는 후배 둘과 함께라는 조건이 조금 더 깊은 얘기를 해야 할 타이밍이라는 생각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현재 이혼 소송 중이며 혼자 산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

아마 눈치 빠른 너희가 그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을지도 몰랐겠다고 하면서요.


결혼한 후배 A는 몇 달 전부터 제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감지했다고 하고, 미혼인 후배 B는 눈이 토끼만큼 커진 채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저는 구체적인 경위를 길게 설명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어떠한 일들로 인해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올해 2~3월에 내가 조금 정신이 없어 보였을 거라고 덧붙였죠.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는데, 생각보다 많이 티나진 않았지?' 하며 살풋 웃었어요.



혼자가 되고 보니 나에 대해 알아야겠어서 홀로 여행도 다녀왔고, 삶을 통제하고 싶다는 감각이 필요해서 운동에 매달렸고, 그럼에도 마음이 힘들 땐 글을 쓰며 나 자신과 대화했다고요.

그리고 지금은 많이 편안해져서 이렇게 나눌 수 있다고 덤덤하게 고백했습니다.


후배들은 회사 선배의 이런 말에 섣부른 위로나 판단을 하지 않더라고요. 대신 그들도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후배 A는 현재 남편과 고민하고 있는 문제, 그 문제를 서로 다르게 바라보고 있는 지점, 그렇게 생각하게 된 성장배경을 나눠줬고요.


후배 B는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가장의 역할을 하게 된 얘기를 짧지만 묵직하게 건넸습니다.




마음의 포장지를 한 꺼풀 벗기고 서로의 속살을 엿보고 나니 우리 사이에는 묘한 친밀감과 유대감이 생겼습니다.

유독 눈 맞춤을 피하는 습관이 있는 후배 A는 먼저 제 눈을 보고 대화하기 시작했고, 업무에 생긴 문제를 저에게 먼저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늘 조금은 거리감이 느껴졌던 사람이 갑자기 가까워진 순간이었습니다.



어떤 날은 우연히 후배 B와 둘이 남아 점심을 먹게 되었어요. 예전 같았으면 업무나 동료 얘기를 하다 조용히 식사를 마쳤을 텐데, 이 날은 달랐습니다.


후배 B는 워크숍에서보다 훨씬 농밀한 자기 얘기를 꺼냈어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몇 번이나 속으로 눈물을 삼켰습니다.

그 책임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삶이 얼마나 단단하게 버텨온 것인지

문장 하나하나에 묻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어리지만 '나보다 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별다른 말은 붙이지 못하고 '참 착하다'라는 말만 겨우 쥐어짜 냈습니다.


회사에서 가장 외향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모습 뒤에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는 걸 알고 나니

그 후배는 더 이상 '일 잘하는 후배'가 아니라

존중해야 할 하나의 삶으로 보였습니다.


이야기를 마치며 후배 B가 저에게 '차장님은 업무적인 면뿐만 아니라 삶도 닮고 싶은 사람이에요.'라며 고백해 올 때는 심장이 2초쯤 멎는 느낌이었습니다.


잘 살아왔다는 안도, 후배에게 '멋진 어른' 같은 모델이 되었다는 데에서 오는 기분 좋은 부담감이 함께 밀려왔어요. 내년이면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데 내년은 '유능한 사람'보다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기로 목표를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늘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었습니다.

질문하고, 경청하고, 상대가 말하도록 돕는 사람이었죠.


하지만 그 이면에는 상대를 충분히 파악해야 안심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상대는 열었지만 나는 끝내 보여주지 않는 관계.
그래서 대화가 질문과 대답에서 멈추고 여백으로 남아버리는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이번에 알게 됐습니다.

지속 가능한 관계는 ‘건강한 자기 오픈’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걸.

깊은 관계는 먼저 열린 사람이 만들고, 그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요.


이제 회사에서 이 후배들을 볼 때면,

'일 잘하는 후배' '같은 부서 직원'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나온 시간과 감정을 함께 떠올립니다.


관계는 쌓아온 시간이나 서사로도 깊어지지만,

함께 거쳐온 에피소드가 늘어날 뿐 진짜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관계는 기다린다고 깊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먼저,
조금 더 솔직해질 때
조금 더 약해질 때
진짜 이야기를 꺼낼 때
상대도 껍질을 벗고 나올 수 있습니다.


관계는 '비슷한 온도의 사람들'이 만드는 게 아니라

먼저 온도를 올린 사람이 만드는 거란 걸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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