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에 대한 러브레터
* 영화의 상세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덕지덕지 푸른 페인트 얼룩이 가득한 남편의 손을 뿌리치고 차를 박차고 나온 아내는 큰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짜증을 억누르려 숨을 고른다.
남편 딘(라이언 고슬링)은 집 수리공, 아내 신디(미셸 윌리엄스)는 병원에서 일한다. 평범한 일상 속, 늘 냉담한 신디와 유쾌한 딘의 온도 차는 선명하다. 라이언 고슬링일 것이라고 예상하기조차 어려웠던 딘의 선명한 M자 헤어라인이 그를 더 재미있어 보이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잘생긴 배우가 못생김을 연기할 때의 짜릿함이란.
영화에서 딘은 '노력하는 남편'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그들이 키우던 반려견 메간이 죽은 후 '미래의 방'이라는 모텔을 예약해 한껏 가라앉은 부부의 기분을 전환시키려 애쓴다. 모텔에서도 신디는 이 관계에서 노력할 의지가 없음을 온 몸으로 표현하고, 이 일은 지금껏 누르고 있던 딘의 감정이 폭발로 치닫는 기폭제가 된다.
이 영화는 대학생 시절 이들의 첫 만남부터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을 중간 중간 끼워 보여주는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현재 신디는 완전히 달라진 반면 딘은 그대로이다.
한 사람만 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딘과 모텔에 가기 전, 신디는 마트에 들러 술을 사는데 우연히 대학시절 남자친구인 바비를 마주치게 된다.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바비를 보며 신디의 표정에 처음으로 빛이 비추듯 진짜 미소가 걸린다. 설레임과 놀람이 섞인 그 얼굴은 옛 연인을 상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청춘 시절 자기 자신을 만난 것 같은 표정이다. 운동선수를 남자친구로 둘 만큼 빛났던 자신의 젊은 날. 의대에 다녔고 유학을 꿈꿨으며 담당 교수로부터 촉망받는 학생이었던 무한한 가능성 앞에 놓였던 자신의 청춘.
지금은 추파를 던지는 동료 의사를 견디면서도 생활비를 위해 병원에 다녀야 하는 간호사이고, 남편은 중졸의 도배공으로 늘 옷과 손에 페인트를 묻히고 다닌다. 딸 프랭키는 부부 사이를 유일하게 이어주는 접점이지만 아이에게 자신 같은 미래를 물려줄까봐 신디를 좌절하게 만드는 존재이기도 하다.
자석의 N과 S처럼 멀어 보이는 이들을 결혼까지 이르게 한 것은 신디의 갑작스런 임신이었다. 전 남자친구 바비와의 사이에서 덜컥 임신을 한 후, 모질게 아이를 지우지도 못하고 수술대에서 기어코 내려온 신디는 자신의 달라질 미래에 혼란스러운 감정에 빠진다. 그런 그녀를 보고 데이트를 몇 번 해보지도 않은 딘이 청혼을 해 버린다.
딘의 청혼 이후 신디가 안정감을 느끼는 장면이 등장하긴 하지만, 신디가 딘을 사랑한 것 같이 느껴지는 순간이 영화에서 별로 보여지지 않는다.
반면 딘은 신디에게 첫눈에 반했고 그녀에게 청혼했으며, 프랭키를 함께 키우고 있는 지금도 관계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아이를 포기할 수 없었던 미혼모 신디에게 딘은 그 때 정답이었지만, 살다 보니 자신의 삶이 정답이 아닌 것 같은 이유가 딘 때문인 것 같은 모순.
자신에게 사랑하면 어떤 느낌인지 물어오는 대학생 손녀 신디에게, 할머니는 사랑해 본 적이 없다고 답한다. 할아버지는 '날 인간으로 존중해주지 않았다'면서.
그러자 오래된 기억이 신디를 스친다. 아내가 정성껏 차린 식탁을 두고 '이런 쓰레기'를 먹으라는 거냐며 소리치는 아빠 앞에서 숨쉬는 법조차 잊고 눈을 질끈 감곤 했던 자신의 모습을.
신디는 인간으로서 존중과 그 존중이 밑바탕된 사랑을 성장 과정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이유로 냉담하고 무심한 어른으로 자랐는지도 모른다. 당사자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사랑하는 방식조차 대를 이어 계승되곤 하니까.
신디는 할머니에게 묻는다.
"사랑이란 걸 어떻게 믿죠?"
딘이 동료에게 묻는다.
"그냥 본 것만으로도 사랑에 빠질 수 있나요? 왠지 아는 여자 같았어요.
첫 눈에 빠지다니. 그 여자는 달랐어요. 그냥 느낌이 왔어요. "
사랑은 찰나의 환상을 품고 시작한다. 나를 설레게 한 그 사람의 일부가 그의 전체일 것이라는 상상에서 관계는 나아간다. 그렇기에 모든 결혼은 한계를 품고 시작한다.
나이가 들어감은 모든 사람이 세상과 자신에게 어느 정도 절망하게 만든다. 그 순간에 배우자의 꼴보기 싫은 모습이 나의 인생을 더욱 한탄스럽게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든 환영 받으며,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던 그 때. 핑크빛의 세상이 자신에게는 언제까지나 관대할 거라고 믿던 그 때, 난 왜 저 사람을 선택했을까 하는 후회 말이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 유독 진지한 기대가 많은 사람일수록 저물어가는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든 법 아닐까.
딘과 함께 할 때 내내 무미건조한 감정을 보이는 신디의 무심함은 딘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한 혐오 같이 느껴졌다.
신디에 비해 딘의 다정함과 유쾌함은 더욱 대조적으로 다가온다.
딘은 요양원의 방으로 퇴역군인이었던 백발 노인의
짐을 옮기면서 그를 단순한 손님이 아닌 '추억과 취향을 가진 한 인간'으로 대해주며 늦은 퇴근을 자처하면서까지 그의 군복을 자랑스럽게 벽에 전시하고 다정하게 설명해 준다.
토가 나오는 맛이라며 오트밀을 먹기 싫다 투정 부리는 딸에게 표범처럼 함께 먹어 보자며 아침 식사를 재밌는 놀이로 만들고, '미치도록 사랑한다'며 아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부어주는 아빠지만 그런 딘도 단점이 있다.
화가 나면 아내의 직장에 찾아가 물건을 부수고 고함을 지르며 아내의 동료에게 폭력까지 가할 만큼 '현재'에만 충실한 그의 성격이다. 그런 그의 성격은 어떤 면에서는 일용직으로 일해도 자족하는 낙천성으로 드러나지만, 한편으로는 가장으로써 미래를 준비하지 않고 현재만 사는 답답함으로 보이기도 한다.
감독은 우리의 흠(flaw)이 특별함(special)을 만드는 거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습니다. 영화는 사람들을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단순히 규정지어 버리기 쉽지만, 내 주위의 실제 사람들은 착하면서 나쁘기도 하고 나쁜 짓을 하는 착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영화가 커플들에게 대화를 시작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영화에서와 같은 일들이 현실에서 불가피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Love is enough'라는 생각을 가졌을 때 일어날 법한 일들이라는 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라이언 고슬링 인터뷰 중>
블루 발렌타인은 과거와 현재 장면에 촬영 방식과 편집 기법에 차이를 두어 둘 사이의 괴리가 더욱 명확해 보이도록 강조한다. 현재에서 인물들이 대화할 때는 마치 옆에서 그 인물을 보는 것만큼 얼굴이 한 프레임에 다 담기지도 못할 만큼 극도의 클로즈업을 해서 그 감정의 변화를 고스란히 느끼게 만들고, 과거 장면에서는 옛날 필름 영화를 보듯 빈티지한 색감에 그 인물 전체와 상황을 볼 수 있게 와이드한 화면에 담았다. 마치 시간이 지난 후 그 때 기억이 추억으로 미화되듯이.
촬영지인 집에서 두 주연배우가 실제로 2주를 생활한 후 촬영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두 배우의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워 내 결혼생활이 많이 떠오르기도 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John Legend의 'All of me'가 떠오른다.
그러나 경계하자.
너의 모든 날카로움까지도 완벽한 불완전함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은 동화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Love is enough'라는 생각을 가졌을 때 일어나는 현실 비극이 바로 이 영화임을.
'Cause all of me
Loves all of you
Love your curves and all your edges
All your perfect imperfections
Give your all to me
I'll give my all to you
You're my end and my beginning
Even when I lose, I'm winning
'Cause I give you all of me
And you give me all of you
<All of me 가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