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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JoYo Oct 22. 2023

잠깐동안, 음악으로부터

바흐, 오스카 페터슨...‘귀벌레’와 ⟨입술에 묻은 이름⟩

§  §  §


베개에 귀를 대고 옆으로 누우면

사각사각, 맥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어린 시절의 나는 조금 괴상하게도,

그 소리가 장화를 신은 벌레들이

행진하는 소리라고 상상했다.


사각사각, 혹은 저벅저벅.

벌레들이 발맞춰 연주하는 리듬.




Ohrwurm.

곧이곧대로 번역하자면

‘귀 벌레’라는 뜻의 이 독일어 단어는

어떤 음악이 귓가를 맴도는 현상을 뜻한다.

영어로는 ‘earworm’이라고 하지만

아직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는

등재돼 있지 않다.


언제나, 또는 느닷없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불쑥,

심지어는 (어쩌면 더더욱)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와중에도,

마치 귀 속에서 벌레들이

합창이라도 하는 듯

어떤 음악은 나에게 들러붙어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런 난.감.함.


당신에게도 지금,

머릿속을, 귓전을 떠나지 않는 노래가,

음악이 있을까?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의

‘아리아’야 말로 내게는

그런 ‘귀 벌레’ 가운데 하나일 텐데,

오랜만에 머레이 페라이어의

연주를 듣다가

이 곡이 이렇게나 프랑스적이었나,

문득 깨닫다.

(‘Ouverture(서곡)’이라고

프랑스어로 적혀 있는,

프랑스 풍의 서곡인 제16변주를

수없이 듣고도 이제서야.)



요즘 들어서야 비로소 들리기 시작한

왼손의 베이스 라인을,

내게는 지극히도

프랑스적인 악기로 여겨지는

비올라 다 감바로 연주해도

흥미롭겠다는 생각.

(⟨골트베르크 변주곡⟩의 변주는,

아리아의 오른손 선율이 아니라

왼손의 베이스 라인을 바탕으로 한다.)


3/4박자의 사라방드,

풍부한 프랑스 풍의 장식음,

페달 포인트를 쓰긴 했지만

워킹 베이스로 재해석이 가능할 법한

왼손의 라인의 우아함은,

왠지 마렝 마레나 쌩트 콜롱브의

비올라 다 감바를 위한 작품들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없지 않다.


흠, 그렇다면 오른손은?




지난주에 영국의 바이올리니스트

레이철 포저와

시대연주 단체 Brecon Baroque는

⟪The Goldberg Variations

Reimagined⟫라는,

채드 켈리(Chad Kelly)가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바이올린 독주와 오케스트라를 위해

편곡한 앨범을 내놓았는데,

하프시코드와 현악기군,

그리고 플루트, 오보에, 바순이

왼손과 오른손의 역할을 돌아가며 맡아

다채로운 음향의 향연을 선사한다.


그러나 아마도 이 분야의 ‘원조’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드미트리 시트코베츠키가 편곡한

현악 3중주 버전이 아닐까.

(불행히도 아래 동영상은

다른 웹사이트에서 재생이 안 되도록

설정이 되어 있다.

귀찮으시더라도 대체불가능한 연주이니,

‘유튜브에서 보기’로 들어보시길.)

 


제라르 코세(비올라),

미야 마이스키(첼로)와

함께 연주하고 음반을 낸 이후로

수많은 연주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바흐 음악의 편곡(transcription)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자리매김했다.


어느 날 내가 느닷없이

비올라 다 감바의 소리를 떠올린 것도,

이들의 연주가 귓속 어딘가에

‘벌레’들의 합창처럼

울리고 있었던 때문인지도.




1964년 발매되고 명반으로 자리 잡은

오스카 페터슨 트리오의 앨범

⟪We Get Request⟫ 중에서,

⟨You Look Good to Me⟩는

아마도 재즈를 좋아한다면

한 번쯤은 ‘귀 벌레’가 되었을 법한 음악.



바흐의 전주곡 가운데 하나라고 해도

살짝 속아 넘어갈 법한

도입부의 ‘주제’를 바탕으로 한,

클래식 음악의 표현을 빌자면

‘변주곡’이다.

(사실 재즈 연주의 기본 구성원리는

‘주제와 변주’다.)


누군가에게 클래식 음악을 중심으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들려줄 때

살짝 끼워 넣어도 어색하지 않은,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작품.




독일어에는

‘귀 벌레’라는 단어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나미가 부른,

⟨입술에 묻은 이름⟩이라는 노래가 있다

(박건호 작사, 이호준 작곡).

이 노래 자체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제목에 담긴 저 표현만큼은 뭐랄까,

짜릿하다고 해야 할까.



‘입술에 묻은 이름’이라니.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잊히지 않는 누군가라니.

그리고 그 기억이,

머리도 아니고 가슴도 아니라,

입술에 묻어서

긴 세월 동안 때때로,

그러나 잊지 않을 만큼은 자주

흘러나왔었다니.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그런 이름쯤 하나 있지 않던가.




그러니까 이 짧은 글들은,

글이라기보다 생각의 단편들은

귓전에 맴도는 노래와 음악들,

혹은 입술에 묻어 문득 흘러나오는

선율과 리듬에 대한 것.


조금은 무계획적으로,

문득, 불현듯, 이곳저곳, 이것저것,

마음이 내키는 대로 배회한 자취들,

잠깐동안,

음악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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