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가볍지 않다. 누가 내 말을 다 기억하지는 않겠지만,
얼마 전 회의에서, 동료가 동의하기 어려운 안을 냈다. 진행 중인 일의 방향에 관한 얘기였다. 내가 알기로는 그쪽이 맞지 않은데, 라는 생각이 입가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대신 물었다. "그렇게 보신 건 어떤 이유에서예요?"
그 질문 하나로 동료는 자기 생각의 배경을 한참 풀어놓았다. 듣다 보니 내가 모르던 맥락이 있었다. 예전에 비슷한 방향으로 갔다가 어떤 단계에서 막힌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 사정을 알고 나니 동료의 안이 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동의까지는 아니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리에 동료가 서 있다는 건 분명해졌다.
오래된 버릇이다. 의견이 다른 말을 들으면, 잠시 숨을 고른다. 반박은 그 다음이다. 그 사이에 내가 모르는 맥락을 묻는다.
동료의 가치관이 그 사람의 시간에서 자라났듯, 내 가치관도 그렇다. 어릴 때 어떤 책을 읽었고, 누구를 만났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어떤 주제에 대해 단단한 의견을 갖고 있다면, 그건 내가 명석해서가 아니라 그 주제와 마주쳤던 어떤 순간들이 내 안에 누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는 모든 이해가 "지평의 융합"에서 일어난다고 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지평 안에 산다. 그 지평은 살아오며 쌓아온 경험과 선이해의 총합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내 지평을 버리고 그 사람의 지평으로 옮겨가는 일이 아니다. 두 지평이 잠시 겹쳐지는 자리를 찾아내는 일이다. 그러려면 상대의 지평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먼저 가늠해야 한다.
가늠하는 가장 정직한 방법은 묻는 일이다. 내가 모르는 그 사람의 시간을, 내 짐작으로 채우지 않고 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일.
대화에서 자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방금 말한 묻기다. 다른 하나는 가급적 주관적 의견 대신 객관적 사실로 말하려는 일이다. 두 가지가 다른 습관처럼 보이지만, 한 뿌리에서 자랐다.
말은 가볍지 않다. 누가 내 말을 다 기억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한 문장은 상대 안에 남는다. 나도 그렇게 살아왔다. 누군가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오래 내 안에 남아서, 어떤 결정을 할 때 슬그머니 작용했던 적이 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 사람이 내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말이 그렇게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부터는 무거웠다.
그래서 의견을 말하는 자리에서 한 번 더 멈춘다. 대신 사실을 말한다. "그 책은 이런 내용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그 책은 별로야"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앞 문장은 상대가 자기 판단을 내릴 자리를 남기지만, 뒤 문장은 상대의 판단 자리에 내 판단을 슬쩍 끼워 넣는다. 사람은 자기 경험에서 자란 의견을 갖고 살아간다. 그 자리에 내 의견을 함부로 끼워 넣을 권리는 나에게 없다.
묻는 일과 사실로 말하는 일이 한 뿌리라는 건 이런 의미다. 묻는 일은 상대의 누적을 인정하는 일이고, 사실로 말하는 일은 그 누적을 함부로 흔들지 않으려는 일이다. 둘 다 사람이 자기 경험의 누적체라는 인식에서 자랐다.
이 두 가지가 한데 묶여 있을 때 떠오르는 음악이 있다. 빌 에반스 트리오의 빌리지 뱅가드 실황. 빌 에반스(피아노), 스콧 라파로(베이스), 폴 모션(드럼) 셋이 뉴욕의 작은 클럽에서 연주한 이 실황은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와 'Waltz for Debby' 두 장의 앨범으로 남았다.
이 트리오의 특징은 솔로와 반주의 위계를 거의 없앤 데 있다. 베이스가 멜로디를 받고, 피아노가 그 뒤를 따라가다가, 드럼이 둘 사이의 빈 자리를 메운다. 셋은 동시에 연주하면서 동시에 듣는다. 라파로의 베이스 라인은 반주가 아니라 또 하나의 멜로디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에반스가 가만히 따라가다가, 적절한 자리에서 응답한다. 같은 곡을 한 사람이 연주했다면 단정한 솔로가 됐을 자리에서, 셋은 서로의 음을 받아 다른 음악을 만들어낸다.
좋은 대화는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 자기 말만 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는 시끄럽지만, 서로를 듣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는 음악이 된다.
대화는 단순히 의견을 교환하는 일이 아니라, 두 사람의 경험이 잠시 겹치는 지점을 찾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지점을 찾기 위해 묻고, 그 지점에 누군가의 가치관을 함부로 옮겨놓지 않기 위해 사실을 말한다.
그날 회의에서 동료의 얘기를 끝까지 들었던 게 잘한 일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자리에서 동료의 지평이 내 지평과 잠시 겹쳤던 건 분명하다. 그 겹침의 시간이, 의견의 일치보다 더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