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와 용서는 나를 위한 선택
몇 해 전 여름이었다. 복도에서 이웃과 마주쳤는데 그는 내 손목을 붙잡듯 서서, 내가 한 어떤 일에 대해 한참을 말했다. 그 일은 실은 내가 한 일도 아니었고, 그의 이야기 속에는 그 사람 혼자만 알고 있는 상식과 기준이 절반쯤 섞여 있었다. 몇 문장을 듣다가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뒤에 무슨 말이 더 오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집으로 걸어올 때, 하늘이 꽤 맑았다는 건 기억한다.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건넨 것이다. 비겁한가.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아내와 저녁을 먹고 고양이와 놀았다. 이웃의 말은 현관 밖 어딘가에 두고 왔다. 거기서 다시 줍지 않았다.
세네카는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썼다. 인생이 짧은 게 아니라, 우리가 그 많은 부분을 남에게 빼앗기고 있을 뿐이라고. 2000년 전 로마의 문장이지만 지금 읽어도 뒷목이 서늘하다. 그는 재산을 훔쳐가는 도둑보다 시간을 훔쳐가는 사람이 훨씬 더 흔하고, 더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도둑맞은 재산은 악착같이 되찾으면서 도둑맞은 시간에 대해서는 이상할 만큼 관대하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건 아량이 넓어서가 아니다. 그 사람을 계속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를 오래 생각해야 한다. 분노의 대상도 어쨌든 생각의 대상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그 사람에게 내 방의 한 칸을 내어주는 일과 비슷하다. 월세도 받지 못하면서.
몇 년 전, 다니던 직장에서 석 달치 임금과 퇴직금이 밀렸다. 대표는 연락을 받지 않았고, 사무실은 조금씩 비어 갔다. 어쩔 수 없이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넣었고, 체당금 제도를 통해 밀린 돈의 일부를 받았다. 행정 절차는 생각보다 건조했다. 서류를 내고, 번호를 받고, 몇 달 뒤 계좌에 입금이 찍혔다. 다만, 내가 받지 못한 금액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게 전부였다.
그때 주변에서 물었다. 대표를 고소해야 하지 않겠냐고. 법적으로 끝까지 가봐야 하지 않겠냐고.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사람을 더 오래 머릿속에 두고 싶지 않았다. 체당금 서류를 접수하고 나오던 그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꽂고 빌 에반스의 'Peace Piece'를 들었다. 피아노 한 음이 공기 중에 천천히 퍼지고, 다음 음이 오기까지 아주 오래 걸리는 곡이다. 음과 음 사이의 공백이 곡의 중심인 것 같은 연주. 그 공백에 그 사람을 놓아두고 왔다. 내 마음 속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자주 이런 말을 썼다. 다른 사람이 뭘 하고 있는지, 왜 그러는지, 뭘 말했는지, 생각하고 계획하는지를 관찰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한심하다고. 로마 황제가 내전과 전염병 한가운데서 적어둔 문장이다. 그는 매일 새벽, 오늘도 쓸데없는 일에 간섭하거나 오만하거나 불성실한 사람들을 만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일러두고 하루를 시작했다. 그 준비가 그를 시니컬하게 만든 게 아니라, 오히려 다정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오래 생각한다.
영국의 에세이스트 올리버 버크먼은 『4000주』에서 사람이 평균 4000주를 산다고 계산했다. 여든까지 산다고 쳐도 대략 4000주다. 이 숫자를 처음 읽었을 때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뒤로 어떤 약속이나 모임을 줄였는지는 꽤 선명하게 기억한다. 4000주 중에서 나는 누구를 미워하는 데 몇 주를 쓸 수 있을까. 어떤 이에게는 한 주도 아깝다.
아깝지 않은 목록은 다르다. 같이 저녁을 먹는 사람. 전화 한 통에 목소리가 밝아지는 사람. 내가 힘들 때 말없이 옆에 앉아 있어주는 사람. 오래된 LP의 B면 같은 사람들. 이 목록은 짧고, 그래서 더 귀하다. 귀한 것들은 원래 개수가 적다.
다시 처음의 복도로 돌아가본다. 그날 "죄송합니다"라고 말한 건 그 사람이 옳아서가 아니다. 그 대화를 가장 빠르게 접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접는다, 라는 단어가 적당하다. 펼쳐두면 먼지가 쌓이는 물건처럼, 어떤 대화는 그 자리에서 접어 서랍에 넣어야 한다(혹은, 찢어서 휴지통에...). 서랍에는 이미 다른 것들이 들어 있다. 아내가 먹고 싶어 하는 저녁 메뉴, 주말에 갈 전시 제목, 두고두고 되새기는 글의 한 장면. 서랍은 공간이 한정되어 있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이 스스로를 착취한다고 말했다. 남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더 하는 사회. 그 연장선 어딘가에서, 우리는 남의 말을 곱씹는 일로도 스스로를 착취한다. 이미 끝난 대화를 머릿속에서 다시 열고, 더 나은 대답을 연습하고, 다시 상처받고, 다시 분노한다. 상대는 그 시간 동안 아마 저녁을 먹고, TV를 보고, 잘 잤을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 나 혼자 그 사람과 싸우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스쳐가는 사람에게는 사과한다. 용서도 한다. 가끔은 속으로 혀를 차기도 한다. 중요한 건 그 일을 오래 들고 있지 않는다는 것. 한 번 쥐었다가, 그 자리에서 놓는다. 그러고 나서 정말 오래 생각해야 할 사람의 이름으로 돌아간다.
우선순위라는 말은 회사 회의에서 너무 자주 들어서 닳아 있지만, 본뜻은 간단하다. 먼저 놓을 것과 나중에 놓을 것을 정하는 일. 나의 순서에서 맨 앞에 있는 건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고, 맨 뒤에 있는 건 나를 훈계했던 그 이웃이다. 순서는 바뀌지 않는다. 바뀌면 안 되는 순서라는 게, 이 세상에 분명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