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행성에게
새해가 밝았다. 나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새해도 되었는데, 무언가를 해야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헬스장으로 향했다. 새해벽두부터 운동이라니, 스스로를 아주 칭찬했다. 큰 보폭으로 러닝머신을 타며 널찍한 유리창밖을 보았다. 뿌듯함을 가득 느끼면서 러닝머신의 속도를 높였다. 아무도 모르는 미소를 씨익 머금었다.
'나를 아주 칭찬해!'
새해부터 운동하는 '나'에게 도취한 나는 1월 1일이 주는 감각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새해는 확실히 긍정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지만서도 양가적인 감각을 준다. 그것은 언제나 긴장과 함께 새롭게 다가온다. '나'란 사람이 완전히 리셋된 건 아니지만, 새해는 빔 프로젝터의 얇고 투명한 빛과 같은 포탈 하나를 건넌 것만 같다. 이로써 나이를 또 한 살 먹었다는 자각과 함께 그럼에도 또 새롭게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사실 해가 지고 떴을 뿐인데, 나이를 먹었다는 자각으로 약간의 초조함이 동반되고, 나는 이 포탈 하나를 건넘으로해서 조금쯤 성장한 것도 같기도 하고 성장 해야만 할 것 같기도 하고, 성장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럼 성장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더 이상 키가 크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늘 자라남을 생각하게 된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반강제로 성과를 내야하기도 하고, 아니면 내 삶을 추동하는 소귀의 성과말이다. 직장 일에서의 어떤 성과를 통해 타인의 인정을 받으면 나는 기쁘다. 일은 정말 드럽게 하기 싫지만 타인의 인정만큼은 좋다. 혹은 작심삼일일지라도 나만의 작은 성과를 이루면, 나는 나 스스로를 쓰다듬으며 칭찬하게 된다. 러닝머신을 뛰고 있는 오늘의 나와 같은 때, 나는 조금이라도 성장한 것만 같다. 어쩌면 이런 성과가 나를 이루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창밖의 해를 바라보았다. 흐릿한 하늘에 떠 있는 해는 늘 그렇듯 묵묵히 떠 있었다. 포털 하나를 건넌 나는 작년 한해 내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해왔는가를 떠올렸는데, 다음의 부사가 꼬리를 물었다. '잘' 해왔는가? 온몸에 땀이 솟았고 숨이 차올랐다.
'잘... 모르겠다.'
훌륭하게 '잘' 성장했는지와 '잘' 모르는 망설임 사이에서, 헉헉거리며 뛰던 나는 러닝머신의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좀 뜬금없게도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떠올리게 되었다. 중천에 떠 있는 저 해는 곧 질테고, 내일의 해는 또 떠오를 텐데. 그러고보면 저 해는 잘 지고 잘 떠오르고 있네? 지구는 잘 돌고 있네? 참 웃기지만 세상은 조용히 잘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걷기를 이었다.
'지구는 돈다.'
과학에는 문외한이라서 잘은 모르지만, 지구는 반시계 방향으로 태양을 공전한다. 지구가 태양 한 바퀴를 다 도는데 드는 시간이 약 365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지구가 열심히 태양 한 바퀴를 다 도는 그 사이 안에서 나이 듦과 성장을 가늠해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것이 공전이라면 자전은 큰 둘레 안의 작은 둘레이다. 지구가 태양을 돌면서 또 스스로 도는 것이다. 이 시간이 24시간이고, 이로 인해 밤과 낮이 생기게 된다. 지구의 자전 속도는 대략 1,300Km/h라고 한다. 내가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에도 지구는 천삼백 킬로미터 매시(Km/h)로 자전하면서 내일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 나는?'
다시 러닝머신의 속도를 높였다. 지구가 천삼백 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새해 버프(buff)를 받은 나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차오른 조급함 속에서 금세 숨이 차오른 나는 러닝머신의 속도를 줄였다. 박동하는 심장을 느끼며 숨을 골랐다. 내가 조급함을 느낀 이유는 문화적으로 '빨리! 빨리!'에 길들여진 탓도 있지만, 시간의 흘러감. 나이가 주는 알 수 없는 무상함의 탓이 크다.
'내가 어느 새 이 나이가 되었다니?'
상상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주소를 우주적으로 써보자면 이럴 것이다. 우주에서 은하계 중 태양계 그 중에서도 지구. 그 중에서도 '나'(우주 은하계 태양계 지구 나) 겹겹의 골목마다 각기의 주소가 있는 것처럼 나 역시 우주로 치면 고유한 존재이자 하나의 행성으로 치환해볼 수 있다. 거대한 우주 질서인 코스모스 안의 나를 생각하다보면 나는 한없이 작고 초라한 미물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래도 나는 그 세계 속에서 엄연한 하나의 행성으로 존재하고 있다.
'나라는 행성.'
나이는 나이대로 먹어가는구나,라든지 내가 지금 멈춰 있다는 생각이 든다든지, 정체된 '나'에 대해 자책하면서 조급함을 느끼고 있다면, 태양계의 공전을 상상해보면 어떨까? 시속 1,300 킬로미터의 속도로 자전하는 지구의 자전을 상상해보면 어떨까? 가늠하기 힘든 큰 상상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의 한복판에 있다. 나는 지금 적어도 시속 1,300 킬로미터의 속도 가운데에 있다.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이 된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세계가 멈춰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처럼 나라는 행성 역시 그렇다. 내 심장은 쉴 새 없이 뛰고 있으며, 나는 내일 또 눈을 뜨고, 걸음을 옮길 것이다. 멈춰 있는 것 같아도 나는 엄청난 속도로 가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의 생각은 해마다 변화하고 있다.
물질적으로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아도 나는 어제와 또 다르고, 그렇게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그것은 성과가 아니고 성숙에 가깝다. 이렇게 보면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의 내적 성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숙은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것은 물질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며, 자연스럽게 체화되는 것이다. 이때 나이 듦은 필수불가결의 요소가 된다.
금방 또 급발진하여 러닝머신의 속도를 높였던 나는 다시 속도를 줄였다. 성장에의 조급함을 느끼기보다도 성과에 목매달기보다도, 조금씩 성숙해가고 있음을 믿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내적으로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마음가짐을 품기로 했다. 해를 보면서 나는 천천히 러닝머신의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