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에 뒤틀려버린 어느 남승무원의 미소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비행기에 탄다.
나는 그들이 비행기를 타는 이유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정말 타고 싶지 않은 비행 편이었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절망과도 같은 기억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때문에 과도한 친절이라거나 그들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만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기본에 충실하여 그들의 기분을 재빨리 살피고 충실히 시중을 들뿐이다.
비행을 하다 보면 참 여러 가지 유형의 승객들을 접하게 되고 짧고 긴 비행시간 동안 그러한 유형들의 승객들을 면밀히 살피게 된다. 이는 비단 서비스라던지 어떠한 일에 관련된 직업정신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니라 이 사람들의 여정이 과연 행복할지에 대한 나의 지극한 개인적인 호기심이 빚어낸 버릇인 것 같다.
특히나 가족단위의 승객들을 더 살피게 된다.
이는 여태껏 내가 떠들어댔던 것처럼 나의 것 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가족유형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해서일 테지만 한편으론 나의 가족관계와 유사점을 드러내는 승객을 발견하고 코끝이 시큰해진 경험이 있은 후로 승객들에 대한 관찰을 더욱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가족여행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덜컥 겁부터 난다.
생전 가족여행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어떤 기쁨이라던가 좋은 기억이라고는 좁쌀한 톨만큼이라도 가져본 적이 없는데 몇 번 다녀온 가족여행조차도 강제로 끌려가듯 다녀온 터라 좋을 리 만무했다.
특히나 비행기를 타고 가족여행을 제주도로 갔을 때에는 제주 중무에 있는 주상절리에서 떨어져 죽고만 싶었다.
2013년쯤이나 되었으려나.
난데없이 내일 오전에 제주도에 가니까 짐을 꾸리라 퉁명스럽게 말을 내던진다.
나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그렇다. 가족여행을 포함해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대소사는 무조건적인 통보식이며 가족구성원들은 그에 반박도 질문도 할 수 없으며 그저 그의 말에 순종하듯 따라야 한다. 그러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짐을 싸야 했고, 몇 박 며칠로 가는지 몇 시 비행기인지, 어느 항공사를 타고 가는지 따위의 질문을 하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그냥 입을 다물고 짐을 싸야 했다. 그런 아버지라는 사람을 나 홀로 '공산당' 또는 '김일성'이란 별명을 붙이고는 매번 홀로 화를 삭여야만 했다.
설렌다거나 무언갈 기대를 한다는 것 역시나 나에겐 사치스러운 짓이었다.
그러기에 그냥 있는 대로 배낭에 짐을 쌌다. 가족여행을 하루 앞둔 가족이란 사람들의 얼굴은 그저 잿빛에 가까운 표정이고 나들이를 앞둔 사람들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익숙했다. 언제나 그래왔으니까.
가는 날이 장날인지, 이윽고 출발하는 당일이 되었는데 안개와 폭우가 말도 못 하게 쏟아졌고 우리가 탑승해야 했던 공항 활주로가 폐쇄되어 1시간 30분이 떨어진 이웃 공항에 가 비행기를 겨우 탈 수 있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그날에도 역정을 내었다.
미친듯한 폭우와 안개 때문에 공항 사정이 좋지 않아 결항이 된 것을 누구 탓을 하리오. 그러나 그는 그 분풀이를 가족들에게 해댔다.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최종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그 누구도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공항에 도착해서야 마침내 어느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게 되는지 알게 됐으나 여전히 몇 박을 묵고 오는지를 모른다. 그리고 언제나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지 괜히 체크인 카운터에 쫓아가 다짜고짜 고함을 질러댄다.
공직에 30년이란 세월 동안 있던 사람이 어찌나 이성적이지도 못하고 무례한지 저런 모습을 본 것이 한두 번도 아니지만 목격을 할 때마다 나랏밥을 먹고산다는 것이나 민원인들을 상대로 오랜 시간 일을 해왔다는 것 그리고 직장동료들과 일을 같이 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게 얼굴이 화끈거리는 익숙함에 무뎌진 나는 비행기에 탔다.
나의 인생 첫 비행기 탑승기 었다. 여기에서도 우리 가족이라는 사람들의 어떠한 이상한 모습이 발견되는데 모두 각자 뿔뿔이 흩어진 좌석이다. 오히려 편하다. 옆에 앉은 가족눈칠 보지 않고 내 맘대로 눈을 돌릴 수 있고 몽상에 잠길 수 도있으며 혹시나 모를 뻘쭘한 상황을 애써 외면하기 좋기 때문이다.
무슨 권위의식일까, 콩가루에 가까운 집안에서 공산당 수령에 가까운 위치에 있는 것? 아니면 지방의 소도시에서 공무원사회에서 요직에 가까운 일을 한다는 것?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들을 향한 언행도 그리 고분고분하지는 않은 그의 모습이다.
그렇게 제주에 도착을 하고 숙소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도, 어디에 가서 숙박을 하는지도, 밥은 어디에서 먹는지도 모른 채 거의 짐짝처럼 끌려다니다 어느 콘도에 도착을 한다.
이 날 아침 집에서 출발해서 제주에 오는 동안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다. 할 말이 없었고 무슨 말을 해서 어떤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그 누구도 입을 떼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근처 식당에 가 늦은 저녁을 먹으려는데 식당들이 빨리 문을 닫아한 옆에 위치한 흑돼지삼겹살 집으로 갔다.
우리를 식당에 팽개쳐두고 담배를 태우러 간 '수령님', 우린 감히 어떤 메뉴를 선택을 해서 멋대로 주문을 해야 하는 자유를 빼앗긴 몸이기에 그냥 메뉴판만 들여다보고 무엇을 먹으면 좋을지 각자 머릿속으로 생각을 할 뿐이다. 그리고 돌아온 그 독재자는 우리가 주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채곤 누가 있으나마나 언제나처럼 욕지거릴 내 쏟는다.
'병신 같은 것들, 떠먹여 준다고 데리고 와도 뭐 하나 주문을 못하냐.'
그리고 종업원을 불러 마치 하인 부리듯 하며 대충 메뉴를 주문한다. 그냥 빨리되는 것 아무거나.
그렇게 우리는 아무거나 주워 먹고 대충 나와 그렇게 잠을 자고 제주광광을 시작을 했다.
이것이 가족이라는 사람들과 평생을 해온 '가족여행'이란 행위의 전모이고 극도로 피하고 싶은 행위 중 하나이다. 그러니 내가 승무원이라는 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가족단위의 사람들이 내 비행기에 탑승을 하면 이 사람들은 어떻게 여행을 하는지, 비행하는 내내 이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앉아가는지 어떤 대화를 하는지를 관찰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버릇이요 습관으로 고착화되어버렸고 혹시라도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승객이 있다면 물이라도 한 잔 더 친절하게 챙겨주고 싶고 이를 힘들게 하는 존재가 있다면 내놓고는 못해도 속으로 같이 욕이라도 흠뻑 해주는 것으로 내 사심을 채우는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출발해 필리핀마닐라로 가는 비행이었다.
다섯 명의 가족 승객들이 탑승을 했는데 어딘가 모르게 행복해 보이는 모습은 아니다.
옷 차림새를 보아 누군가의 빈소에 문상을 간다거나 병문안을 간다는 복장은 아니었고 지극한 열대지방으로 향하는 여행객들의 차림새다.
아이들의 표정은 너무나 시큰둥했고 그 아이들의 엄마는 몹시 건조한 표정으로 비행기 탑승을 한다.
세시간여 비행시간 내내 이 가족들은 서로에게 한 마디 말을 하지도 않았고 서로를 쳐다도 보지 않았으며 물 한잔조차도 입에 대지 않았다. 마치 십여 년 전 제주로 가는 나와 내 가족이라는 사람들의 모습과도 너무 닮아있었다.
기내점검을 위해 갤리에서의 짧은 휴식을 마치고 캐빈으로 들어가려는데 그 가족의 아이 하나가 뒷 갤리 앞 화장실 앞에 서 있다. 눈이 마주쳐 짧은 눈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려다 안 되겠다 싶어 스몰토크를 시작했다.
'마닐라로 가족여행을 가시나 봐요, 좋으시겠어요.'
물론 가족여행을 가는 것도, 좋지 않으리라는 것도 뻔히 알고 있었지만 누군가라도 이 사람의 기분을 알아준다거나 하다못해 한 마디라도 들어줘야 할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
기다렸다는 듯 그는 '마지못해 가는 거예요, 제가 행복해 보이시나요.'라고 피식 웃으며 조롱이 섞인 농담조의 대답을 건네왔고 나는 그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한 후 가방에 크루들과 먹으려고 챙겨 온 초콜릿을 한 줌 꺼내어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고는 '그럴 것 같아서 물어본 거예요. 나도 그랬었거든요.'라고 말을 건넸는데 그는 예상외로 아주 재밌다는 듯 웃어젖히더니 고맙다고 하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내가 기내를 왔다 갔다 하며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어 보이기도 했고 마닐라에 도착해서는 고맙다는 말을 하며 떠났다. 그리고 약 2주 후 그 손님으로부터 칭송레터를 받았다.
어린 나의 나도 그런 것을 원했던 것 같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누군가 나의 인생을 갸륵하게 여기고 불쌍히 여겨 이것저것 챙겨주고 보듬어주는 것은 딱 질색이다.
그러나 눈치껏 내가 좋지 않음을 다섯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지긋하게 봐준다거나 '나도 다 알아, 이해해'라는 외마디로 그냥 나의 공간과 시간을 오롯하게 나의 것으로 지켜주는 그것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가정사는 모른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행복해하지 않았고 그럴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계획도 없었지만 그냥 이해한다는 제스처와 무심한 듯 건네주는 작은 선물. 아마도 우리 모두는 이런 것을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시간과 공간을 침해하지 않는 적당한 거리에서 말이다.
이 일이 있기 전에도, 그 후로도 항상 가족단위 승객들을 관찰한다.
화기애애한 그러한 모습들이 여전히 신기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는 저 집구석에는 과연 어떤 기구한 사연이 있을지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이런저런 소설을 써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비행이란 일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나의 멍에 같은 추잡스러운 과거들을 떠올릴만한 연결 고리들의 대부분이 끊어진다는 것이다. 핸드폰 인터넷이 원활치 않으니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부분들로부터 방해를 받을 필요도 없고 그냥 오로지 일에만 집중하고 같이 비행을 하는 동료들 그리고 승객들에게만 집중을 하면 된다는 것이 좋다. 서비스부터 보안, 안전 점검까지 신경 쓸 일들이 셀 수 없이 많아 잡다한 생각을 할 수 없단 것이 좋으며 수백의 승객들에게 맞추어 서비스를 해야 하는 그런 정신없음이 좋다.
비행을 마치면 피곤한 몸을 뉘이는데 바쁘고, 해외 레이오버 비행을 가게 되면 그곳에서 또 관광하고 놀 생각에 나를 항상 에워싸고 있는 좋지 못한 기억들에 잠식될 필요도 없는 것도 좋다.
항상 미소를 지어야만 하는 나를 보는 승객들이나, 매번 유쾌하기만 한 나를 보는 동료들은 과연 이런 그림자에 뒤틀려버린 미소를 짓는 나의 내면을 알기나 할까.
몰라도 좋고 알아도 좋다.
그러나 다섯 발자국 즈음 떨어진 곳에서 나의 공간과 시간을 침해하지 않는 곳에서 나지막이 '이해해' 한마디면 족할 것 같다.
이런 유년시절의 이야기와 나의 속내를 털어내는 것이 흡사 고해성사와도 같은 것이 지독하게 싫다.
내놓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속에서 곪고 썩어 평생 동안 나를 짓누르고 겁탈하던 이런 멍에와도 같은 음습한 기억들을 터놓고 언젠가는 얘기를 해야 했고 쏟아내야 했다.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좀 편안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도 어제처럼 이런저런 글감을 생각하며 무심하게 의식의 흐름대로 오늘도 글을 써 내려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