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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chard B Sep 14. 2024

09_코 끝에 맺힌 그 계절의 냄새

'내가 추운 사람이라 추운 계절을 좋아해.'

내가 기다리는 계절은 소담스러운 꽃망울이 튀어 나는 봄도 아니고, 만물이 푸르고 무성하게 피어나는 여름도 아니었으며 온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든 풍요한 가을도 아닌 그저 시린 겨울이다. 

굵고 탐스럽게 내리는 눈이 좋아서도, 크리스마스에 사방에 울려 퍼지는 캐럴이 좋아서도 아니다.

단지 그 시리고 차가움이 익숙해, 그 쨍한 한기가 나에게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나와 닮아있기 때문에 좋아할 뿐이다.



익숙함이라는 감정은 정말이지 무서운 감정이다.

좋건 나쁘건 익숙함이라는 느낌에 속아 좋은지 나쁜지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우도 있으며 항상 있어왔던 익숙한 무언가의 부재는 또 다른 불안감을 조성하곤 한다. 그것이 나에게 추위이며 내가 그리워하면서도 그 그리움의 이면에 항상 불안감을 주는 존재로 자리 잡혀있다.


언젠가부터 청승 떠는 일을 참 좋아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겨울로 넘어가는 늦가을 문턱에 황혼이 내려앉으면 그 스산한 기운에 관한 울적함을 즐기려 슬픈 노래를 들으며 집 앞 카페에 앉아 일기장에 알 수 없는 적적함을 써 내려간다거나 특별히 할 일도 없는 채 넋을 놓고 앉아 그저 슬픈 발라드와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일을 참 좋아했다.


처음 이 짓을 시작한 것은 누군가를 짝사랑하기 시작하면서였고, 그런 감정을 내놓고 표현하는 방법을 깨치지 못했던 어리석은 나는 그렇게라도 혼자만의 연민의 감정을 달래는 것에 점차 익숙해졌고 월례 행사 내지는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는 집안의 크고 작은 소동으로부터 피신해 또 그 주제에 대해 신랄하게 나의 삶을 비관하는 글을 적어 내려가며 스스로를 달래고 또 위안을 하곤 했다.


어느 날은 그리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술자리를 했고 어찌하다 계절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무슨 계절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겨울을 좋아하고 특히나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절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런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갖가지 추측을 해댔고 나는 나의 솔직한 대답이 그 자리에 가져올 파장을 알았기에 그냥 모든 사람들의 추측이 정답이라 외마디 대답을 내던지고는 담배를 태우러 나갔다.


그날도 역시나 추운 늦가을이었고, 내뿜어버리는 담배연기가 입김과 뒤섞여 어느 것이 나의 입김인지 담배연기인지 분간도 할 수 없을 만큼 퍽 추워진 어느 날 밤이었다.


멋들어진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사람들과 걸판진 술자리를 갖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고급스러운 실크 머플러를 여미며 종종걸음을 걷는 사람들도 보였고 어느새 패딩을 둘러 입고 월동을 마친 사람들도 보였다.


연말이 다가오기 때문일까 눈에 띄는 사람들은 저마다 갖가지 이유로 모인 술자리에서 연신 크리스마스와 연말에 대한 계획을 주고받기 바빠 보였고 어떤 이들은 연말이라는 기간이 주는 그 특별함과 설렘을 간직한 채 앞니를 훤히 드러내놓고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소주의 취기로 알딸딸함을 어느 정도 머금은 채 그런 다정스럽고 훈기 넘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덩그러니 둘러보며 맥없이 웃으며 터덜거리며 원래 앉았던 테이블로 돌아가 그저 이 추운 날씨가 좋아서 오늘이 즐겁다거나 술기운이 올라 찬바람을 좀 오래 쐬고 온 아무런 사연 없는 사람인 양 웃고 떠들며 자리를 마무리했더랬다.



어쩌면 매 해의 추운 겨울과 연말은 나에게 특별한 기간이 되었었을지도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12월의 마지막 날에 생일이라는 같잖은 연례행사를 해마다 맞이해야 하고, 그 무렵이면 크리스마스라던가 이래저래 크고 작은 모임이라던가 하는 이벤트들이 많아 즐거워야 했지만 그런 뒤틀린 이면에 자리 잡은 그림자는 그런 특별할 수 있었던 연말을 마냥 즐길 수 있도록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30일, 연속된 숫자 세 자리와 0.

외우기도 싶고 해넘이 하는 날의 바로 직전이라 잊어버리기도 어려운 날짜인데 생일이라는 날의 의미를 인지하기 시작한 다섯 살 무렵부터 서른을 넘겨버린 지금까지 가족이라는 존재들로부터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이라던가 딱히 선물이라는 것을 받아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아니, 그보다는 가족끼리는 그런 것을 주고받지 않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고 친구들, 지인들과는 그냥 술을 마시고 놀기 위한 어떠한 장치인 줄로만 알았다. 


고향 본가 어딘가에 먼지에 뒤덮여 저기 구석에 처박혀있는 빛바랜 사진앨범을 열어보면 다섯 살 무렵 동네에서 같이 나고 자란 친구들과 생일상을 차려놓고 나름의 잔치를 했던 사진 한 두어 장과 작은아버지로 받았던 기차 장난감, 서울 사는 고모에게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장갑 한 짝과 손 편지 그리고 엄마라는 존재로부터 미역국 한 두어 번 정도 얻어먹은 기억이 고작인 것 같다.


여하튼 걷기 시작해 지금까지 생일이라는 어떤 연례 이벤트를 해마다 겪어오면서 가족들이라는 존재들로부터 생일을 축하한다, 나의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둥의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나 있을법한 현실감이 떨어지는 대사를 듣는 것은 꿈도 꿔 본일이 없기에 그냥 모두들 이렇게 지나가는 것이라 생각을 했었으나 몇 해 전 같은 동네에서 자취를 하던 친구가 그의 부모로부터 받은 정성스러운 선물들을 보며 생각을 좀 달리했더랬다.


아, 원래 이런 것이 '정상'이구나. 이런 모습이 가족들이라는 존재의 '순기능'이구나.

나를 포함한 다섯이나 되는 사람들로 구성된 나의 가족의 존재가 0에 수렴하는 것을 실감한 날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주변에 좋은 사람들, 그러니까 나와 잘 맞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덕분에 가족들로부터 받지 못하는 어떠한 정성스러운 선물이나 축하말들을 매 년 들어오고 있다.


어느 날은 생일 무렵 고향집에 머물 일이 있었다.

연말이라 그리고 생일이라 친구들과 거나한 술판을 벌리기 위해 초저녁부터 꽃단장을 하며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모친께서 툭 쏘는 한 마디를 던진다.


'또 나가나? 나가면 또 아침에 해 뜰 때 들어오나?'


아니란 걸 알면서도 혹시 내 생일이라고 미역국이라도 한 솥단지 끓여놓았나? 아니면 어디 나가서 밥이라도 한 끼 하려나? 하고 주방을 돌아다니며 냄비마다 달린 뚜껑을 열어보고 손바닥만 한 케이크이라도 어디 숨겨져있나 보려고 냉장고에 달린 문이란 문은 죄다 열어보았다.


아픈지 알고 맞는 매가 더 아픈 것이랑 같은 맥락일까, 아닐 줄 알았지만 정말 나의 생일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동태찌개를 끓여버린, 쓸데없이 냉장고 문을 여닫는다고 잔소릴 하는 엄마란 존재에게 심술이 더 나서 괜히 한마디 쏘아붙였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나 봐, 미역국도 안 끓였네. 계모 아니야?'


한 날에 아이 두 명을 낳고도 여전히 이들의 탄생하던 그 날짜에 대해 무감각하다. 무관심하다는 말이 맞는 것일까.


그렇다, 나는 쌍둥이다. 세상에 그리 흔치도 않은 이란성쌍둥이.

열 달 동안 남산만 한 배에 하나도 아닌 둘이나 되는 새끼를 품고 있다 동날 동시에, 2분 간격으로 아들, 딸을 놓았는데 여전히 그녀의 자식들의 생일에는 굉장히 무관심한 편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매 번 화가 나있거나 언짢은 표정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아버지라는 사람이 퇴근을 해 집에 들어왔고, 도의적으로 건조한 퇴근인사를 건네며 혹시라도 하는 마음을 내심 품어본다.


참으로 병신스럽기도 하지.


왜 그의 손에 작은 케이크상자라도 들려있길 바랐던 걸까, 왜 그가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할 것이라 생각을 했던 걸까. 부모라는 사람들은 진정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축하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어느 순간부터는 후회를 하고 있기에 그 축하하던 감정마저 사라져 버린 걸까. 짧은 찰나에 오만 생각을 다 하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추운 한 겨울이었다.

눈발마저 날리기 시작한다. 크리스마스는 지난 지 닷새나 되었지만 여전히 캐럴이 울리고 사람들은 신나게 종종걸음으로 삼삼오오 연말연시를 즐기기 위한 각자의 발걸음을 옮긴다.


여전히 추운 한 겨울이고, 옷깃 사이로 살을 에는듯한 칼바람이 파고들어 온다.

정신이 든다. 아, 나 이런 추위에 익숙한 사람이었지. 이렇게 사는 게 내 모습이었던 거지.

집에 보일러를 너무 잘 틀어놔서 추위에 익숙한 사람이 나라는 것을 깜빡 있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몇 년이 지난 그 후 외국에 살기 시작한 작년에도 그 흔해빠진 축하의 메시지를 한 통도 받지 못했다.

같은 날 2분 차이로 태어난 동생이라는 존재에게서도, 막냇동생에게서도 그리고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꺼내놓은 공동저자인 부모라는 존재들에게서도. 


아마 얼마 남지 않은 올해의 생일에서도 그럴 것이고 내년 생일에도 그럴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듯.

망각의 동물의 표본이 나고, 그 멍청함의 대명사가 나인 것만 같은 순간이 바로 내 생일이다. 


무얼 바라.



너무 슬프게만 생각할 일도 아니다.

누군가 지레짐작으로 읊었듯이 멋들어진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종종걸음으로 걸어 다니는 이유에서나 까닭 없이 퍼붓는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교회엔 다니지 않지만 괜히 설레게 하는 크리스마스도, 그냥 추위 그 자체도 내가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에 포함이 된다.


또 한 때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두 해나 정성스러운 생일상도, 나의 취향과 필요에 꼭 들어맞는 선물도 받았던 적이 있고 생일 겸 해맞이할 겸 여행도 다녀오면서 가족이라는 존재가 아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존재로부터 오로지 나만을 위한 날을 선물 받았던 적이 있었다.


세상 모든 것에는 유통기한이 존재한다.

물건이 되었건 사람사이의 어떤 관계가 되었던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 모든 것들은 끝이 나기 마련인데 한 폭의 그림 같았던 그 장면들이 문득 생각이 날 때가 있다.


나는 항상 추웠던 대로, 추위를 좋아했던 사람으로 그리고 그것에 익숙한 상태로 제 자리로 돌아온 것인데 일탈 같았고 꿈같았던 그때를 간혹 그리워할 때가 있다.


나는 청승을 떠는 것을 좋아한다.

올해 겨울에는 고급스럽게 청승을 떨고 싶다.


유럽에 비행을 가게 된다면, 파란 눈에 높은 코를 한 서양사람들 틈바구니에 홀로 끼어 앉아 그럴싸한 양식 한 접시와 와인 한 잔을 놓고 스스로를 축하해주고 싶다.


'나의 생일을 축하하지는 않아, 그러나 오늘을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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