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에서 아이와 한 달 살기
2024년 1월 2일, 새해 연휴를 보내고 있는 곳은 하얀 눈이 세상 가득한 핀란드 헬싱키였다.
아침부터 해가 떠오르는지 알 수 없을 만큼 하늘에서 끊임없이 함박눈이 흰 꽃처럼 날리고 있다.
언제쯤 멈출지 가늠이 안될 정도로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다.
오늘은 핀란드 숙소를 빌려주신 Jalle(얄레) 교수님과 그의 부인 Riita(리따)의 본가에 초대받았다.
두 분이 20년이 다 되도록 살고 계신 아파트이니, 진짜 핀란드인 집에 가게 되는 사실이 설레었다.
Jalle와 Riita는 내가 10년 전 핀란드에서 일하던 시절 협업하는 동료였던 프로그래머 Otto의 부모님이시다.
Otto(오또)와는 아주 가끔 메신저로 연락을 하는 사이였는데, 딸과 한 달을 살러 핀란드에 간다고 하니,
선뜻 본인의 부모님의 집에서 지낼 수 있도록 선뜻 조율해 주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오또의 어머니인 Riita는 핀란드에 낯선 우리 둘이 왠지 밋밋하게 새해를 지내는 것이 안쓰러우셨는지, 꼭 놀러 오라고 1월 1일, 1월 2일 언제 시간 되는지 여러 번 물어보셨다.
나는 한국에서 사 온 김부각과 유과 과자를 들고 두 분 댁으로 찾아갔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앞도 잘 안 보일 정도였는데, 함박눈을 뚫고 주소대로 찾아가 본다.
핀란드 말은 참 길기도 하지.
Raatimiehenkatu는 어렵지만, 구글 맵의 도움으로 찾는데 크게 어렵지 않았다.
30분이 넘도록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면서 도착하니, Riita가 두 팔 가득 꽉 안아주시면서 반겨주셨다.
내가 만나왔던 핀란드의 할머님들은 대체로 보수적이셔서 새로운 친구, 외국인에 대해 어색해하시는 편이다.
하지만, Riita는 우리와 잠시 인사한 것뿐인데도 활짝 핀 진심의 미소로 반겨주셔서 신기했다.
마치 오랫동안 알아온 손녀와 딸을 맞이한 듯 친근하게 맞아주시니 꽁꽁 얼었던 몸이 녹아내렸다.
친근한 환영을 받고, 우리는 집을 둘러본다. 큰 창밖에는 눈이 하얗게 날리고 있고, 그 안으로는 커다랗고 화려한 꽃 화분들이 늘어서 있었다.
두 분이 오랜 세월 정성껏 가꾸어오신 화초들은 집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고, 바깥의 영하 20도 겨울날씨와 대비되는 따뜻한 분위기였다.
북유럽 풍의 고풍스러운 식탁, 소파들에서 오랜 세월 써오신 손길과 검소함이 고상하게 묻어있었다.
딸아이는 얄레 할아버지, 리따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핀란드에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생긴 것 같다고 신나 한다.
우리 모녀에게 색다르고 신기한 어르신 인연이 생겼다는 사실이 꿈만 같다.
아이는 여기저기 편하게 둘러보고 있다.
내심 아이가 이 시간과 공간을 즐기고 있음에 마음이 놓이면서도, 혹시 무례하게 보일까 싶어, 아슬아슬해서 쿡쿡 찌르면서 진정시킨다.
얌전하게 있어~
물건 안 부서지게 조심해야 돼.
예의 바르게
아이가 낯을 가리지 않고 소파에 앉아 흥얼거리는 모습이 오히려 귀여우셨는지
리따 할머니는 편하게 하라고, 여기저기 가보고 구경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얄레 교수님이 직접 요리하신 감자오븐요리가 다 되었는지, 식사에 필요한 요리들이 하나씩 부엌에서 옮겨진다.
우리를 위해 버터, 베지테리언 버터, 유기농 버터 등 다양한 종류로 준비해 주셨다.
미리 말씀드린 것도 아닌데 혹시 몰라서 치즈도 유기농, 브리치즈, 리코타 치즈 등 4가지가 넘게 꺼내오셨다.
치즈와 버터를 무척 좋아하는 딸아이에게는 완전한 취향 저격이었다. 눈이 번쩍해서 기분이 좋아져 있다.
식탁 올라온 음식들을 나열해 보면,
감자와 치즈가 겹겹이 쌓인 그라탱,
올리브, 토마토, 아보카도가 있는 샐러드,
훈제 연어구이,
다양한 핀란드 호밀빵, 까만 빵, 유기농 과자, 초콜릿, 까만 핀란드 젤리 살미야키,
일반 버터, 베지터리언용 버터, 염소치즈, 리코타 치즈, 브리 치즈
콩 수프, 신기한 핀란드 가정식 요리들이 가득했다.
호밀빵도 종류 별로, 새해 연휴에 어울리는 핀란드 연말 만찬 디저트도 보였다.
진정한 새해 파티 음식이니, 우리는 감개무량이다.
이렇게 잘해주시다니... ㅠㅠ
정성스럽게 준비된 요리가 식탁에 가득한 것을 보니, 두 분이 이른 아침부터 준비하신 게 틀림없었다.
무한한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산타 할아버지를 똑 닮았을 것 같은 얄레가 직접 만드신 감자 그라탱 요리는 꽤 맛있었다.
리따 말씀에 따르면 얄레 교수님은 거의 요리를 하지 않는데, 우리가 온다고 해서 직접 준비하셨다고 했다.
"와~ 맛있어요~" 감탄하는 이야기에 쑥스러워하시는 표정에 귀여움이 묻어있었다.
리따(Ritta)는 집의 거실, 안방, 침실을 천천히 보여주셨는데, 두 분 모두 심리학과 교수님 출신으로
세계 곳곳 학회를 많이 다니면서 여행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각 방마다 진열된 예술 작품들은 몇십 년이 되는 긴 시간 동안 살아오신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일본, 중국, 태국, 아프리카, 이집트 등 다양한 나라에서 열린 심리학 학회를 참가하시면서 현지의 학계 분들로부터 받은 그림, 조각들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나는 심리학이라는 분야에 원래 관심이 많았지만, 학회를 다니면서 두 분이 세계 곳곳을 여행한 이야기를 들으니 부럽기만 했다.
여러 작품 중에는 한국 지인에게서 받은 한국 병풍도 있었다. 정성스럽게 수놓아진 자수를 핀란드 가정집에서 볼 수 있게 되니 반갑기도 하고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식탁 뒤로 펼쳐진 병풍에는 아름다운 꽃과 나비가 그려져 있었는데, 찾아보니 화조도 작품이었다.
화조도 병풍 설명
꽃과 새를 그린 화조도(花鳥圖)를 수놓아 꾸민 열 폭 병풍이다. 폭마다 바탕천의 색이 다른 것이 특징이다. 매화, 연꽃, 복숭아꽃, 월계화, 모란, 석류, 국화 등의 꽃과 그에 어울리는 여러 종류의 새 또는 나비 한 쌍씩을 수놓았다. 평수와 자련수, 자릿수, 이음수와 매듭수 등 다양한 자수 기법이 사용되었다.
화조도는 장수, 부귀, 다산, 출세, 부부 금슬 등 길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자수 병풍은 회화 병풍에 비해 화려하고 입체감을 느끼게 한다.
[출처] 서울 공예 박물관- 소장 자료 설명
인터넷으로 조사해 본 내용을 조곤조곤 설명해 드리니 리따의 눈이 반짝거렸다.
우연히 받은 선물에 근사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신이 난 표정이었다.
이 병풍이 건강과 행복을 바라는 거구나.
귀한 선물이었네~
핀란드 어르신들 중에 일본, 태국, 중국에 여행한 분들은 꽤 있지만.
한국에 방문하거나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상대적으로 모르는 분위기가 있다.
물론 요즘은 10-20대에게 K팝이나 아이돌, 한국 음식이 유튜브나 넷플릭스 통해서 알려지고 있지만, 60-80세에 가까운 분들은 북한 상황 정도만 알고 "한국에 햄버거가 있냐. 초콜릿이 있냐" 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Jalle 교수님은 화조도의 깊은 의미에 관심을 보이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셨다.
작은 역할이지만, 조금씩 한국을 소개하는 상황이 되면 뿌듯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서로의 문화에 대해 배우고, 이해하는 것은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 타임.
나는 한국 슈퍼에서 사 온 김부각 세트를 드렸다.
리따는 "이거 어떻게 먹는 거니? 식사할 때 먹니 아니면 디저트?" 물어보시더니
한 개 베어 물고 맛있다고 좋아하셨다. 다행이다.
두 분이 티 타임할 때 색다른 맛을 경험하시면서 우리를 기억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식탁에 김부각이 올라가니 핀란드의 까만 젤리와 함께 서로 다른 문화가 어우러져 있었다.
핀란드 가정식 새해 파티가 더 특별해지고 있었다.
Runebergintorttu 미니 케이크
오늘은 마침 핀란드 전통 휴일은 'Runerberg Day'였다.
리따는 이 특별한 날을 맞아 Runebergintorttu 케이크를 정성스럽게 준비해 주셨다.
이미 배가 불렀지만. 한입 베어 무니 달콤한 딸기잼과 진한 버터 향이 입에 가득해졌다.
꽤 뻑뻑하고 밀도가 높은 빵이었는데, 진득하니 풍미가 좋았다.
Jalle 교수님은 이 케이크의 배경인 루나버그 데이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평소 빵집에서 봤던 케이크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어 흥미롭고 뜻깊었다.
루나버그 데이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덧붙여본다.
핀란드 기념일 Runeaberg Day
루나버그 데이 Runaberg Day는 핀란드의 시인 Johann Ludwig Runeberg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날로, 매년 2월 5일에 기념된다.
Runeberg의 생일에 맞춰, 사람들은 그의 가장 좋아했던 디저트인 ‘Runebergintorttu’를 즐긴다. 이 디저트는 보통 아몬드 가루, 설탕, 밀가루로 만들어진 반죽에 라즈베리 잼과 럼주 또는 위스키를 넣어 구운 작은 케이크다. 겉면에는 흰 설탕 글레이즈가 덮여 있어, 한 입 베어 물면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진다.
핀란드의 눈 내리는 겨울 새해 아침,
우리는 비록 핀란드 여행을 온 관광객이었지만, 오늘 교수님 댁에서의 만찬을 통해 맛있는 식사를 하고, 더불어 핀란드 사람들과 문화와 한결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 무척 즐거웠다.
집을 나서기 전에 Riita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내 그림을 선물로 드렸다.
맑은 영혼이 느껴진다고 무척 좋아하시는 표정을 보니 나도 행복해진다.
딸아이가 핀란드 집에 초대받아서 그 공간을 경험하고, 기억할 것이라는 사실이 기쁘다.
앞으로도 가능한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쌓고, 생각을 열어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올해 겨울 핀란드 한 달 살기는 우리 둘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고 있다.
소중하고 귀한 추억...
다음 편에서는 배를 타고 갔던 스웨덴 여행 이야기를 적어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