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당퐁당 100편 글쓰기 45화
이런, '소리소문 없이 나 홀로 휴가' 작전이 오후 2시쯤을 기점으로 맥없이 들통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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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기 전 꼭 들르고 싶은 책방이 있기에 느긋했던 발걸음의 속도를 올렸다. 분명 카카오맵의 지도는 찾아가는 길을 큰 도로로 알려 주었건만, 나는 굳이 이탈해서 귤나무와 돌담으로 둘러싸인 좁은 길목에 들어섰다. 고작 소형 트럭 한 대가 간신히 지날 법하려나. 만약 트럭과 마주친다면 돌담에 납작하게 붙어서 꽃게처럼 걸어야 할지도 몰랐다.
겁 없이 나의 방향 감각에 의존하려고 했다. 다행히 눈치 빠른 카카오맵은 그 길로 가도 좋다고 융통성 있는 대안을 내놓았다. 게다가 담장을 훌쩍 넘어 길가로 뻗어 나온 나뭇가지에 몇 걸음마다 올레길을 표시하는 빨강과 파란색 리본이 매어 있어서 나를 안심시켰다.
올레길 걷기는 원래 계획에 없었다. 양 옆으로 죽 둘러쳐진 돌담 넘어 주황빛으로 영근 귤들이 흐드러지게 매달려 있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귤림추색을 만끽하다니, 뜻밖의 수확에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제주에 10년 넘게 살면 안 가본 올레길이 없고, 안 오른 오름이 없을 거라 누군가는 생각할지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나에겐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다. 터를 잡고 사니까 언제든지 갈 수 있다는 안도감이 제주의 자연을 누릴 기회를 차일피일 미루게 했다.
'이렇게 좋은 여유를 제대로 못 누리고 살다니.'
나는 대체 어떤 자유를 원하는 걸까. 시간을 버는 대신 경제적 굴레에 얽매일 것인가. 경제적 자유를 얻는 대신 시간을 저당 잡힐 것인가. 전업주부였을 때와 직장인일 때의 이점을 서로 견주어 보며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고민을 낱낱이 풀어헤치던 찰나였다.
부르르르르르르-
핸드폰 진동음이 고요함을 깨뜨렸다.
남편이었다.
"여보야, 어디고?"
"비밀이다. 비밀."
"뭔 비밀이고. 얼른 말해봐라. 궁금하다."
"신비주의다. 신비주의."
"캬하, 우리 사이에 뭔 신비주의고. 어서 말해보라니까."
"걱정 마라. 제주도다. 제주도."
"하, 거참. 허허허허허"
집요하게 물어보는 남편에 맞서 부산인의 특징, 같은 단어 반복하기를 시전 하며 질문을 튕겨내는 나. 연애 시절에도 안 하던 밀당을 결혼 생활 10년이 넘어서하는 내가 기도 안 찼으려나. 남편은 속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안심하시오. 비행기 타고 육지로 도망가진 않았으니까. 남쪽에서 북쪽 끝으로 간들, 서쪽에서 동쪽 끝으로 간들 다 같은 제주도라는 사실은 변함없으므로.
그이 역시 때마침 이수해야 할 교육 때문에 야외를 걷는다고 했다. 강의실에 앉아 PPT자료만 보는 강연이 아니라 올레길을 걸어서 수료하는 현장학습이란다. 하필 그 올레길이 우리 집 바로 코 앞이란 사실이 이 사람을 심심하게 만든 것이다. 회사까지 걸어서 되돌아갈 길이 까마득했는지 나더러 태워달라 할 참이었다고 말했다.
"이를 어쩌지. 난 지금 꽤 먼 곳에 와 있는 걸."
익숙해서 단조롭기 그지없는 그의 공간과 초면이라 신비롭기까지 한 나의 공간이 휴대전화를 사이에 두고 다른 풍경으로 펼쳐졌다. 별수 없이 한경면 저지리에 와 있어서 당신을 데리러 갈 수 없다 고하고는, 농담을 만담처럼 주고받던 통화를 끝마쳤다. 각자 남은 오후를 값지게 보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올레길과 오름도 가보지 못한 곳이 많은데 하물며 이름난 독립서점이라고 다를까. 틈틈이 시간만 허락한다면 가보고 싶은 장소를 버킷리스트처럼 저장해두고 있었다. 드디어 오늘, 그중 하나를 달성할 수 있었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세계의 서점 150에 선정됐다는 책방 소리소문. 난 이곳에 죽기 전에 꼭 발을 딛고 싶었고 소원을 이뤘다. 예상대로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니, 안 가보면 내내 아쉬울 거 같다는 심리가 내게만 발동한건 아닌가 보다. 외국인들도 드물지 않게 보였다.
역시나 소문대로 큐레이션이 훌륭했다. '아무튼' 시리즈만 일렬로 주욱 늘어놓는다든지, 제주에서 활동하는 화가들과 협업해서 명작들의 북커버를 새로 꾸몄다든지. 이미 읽었던 책들이지만 다른 서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감각적인 표지를 보자마자 냉큼 집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구매욕구가 꿈틀대니 위험했다. 이곳에 오려면 두둑한 지갑은 필수였던 것이다. 같은 책도 다르게 보이게 하는 것, 관심 없던 분야의 책도 손 내밀어 책장을 열어보게 만드는 것. 이것이 큐레이션의 매력인가.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책들과 대중적인 베스트셀러의 비중이 적절히 배치된 듯 보였다.
나는 주제별로 나뉜 서가를 구석구석 전시를 감상하듯이 둘러보았다. 각양각색의 책등과 표지를 쫓느라 눈이 분주했다. 그중 관심 가는 책들은 조심히 샤라락 펼쳐서 목차와 한 두 페이지를 훑고 내려놓다 다시 집어 들기를 여러 번. 다 사고 싶었지만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집으로 가져가서 지금 당장, 반드시, 읽고 싶은 책만 골라야 한다. 고민할 시간이 넉넉하단 사실로 충분히 행복했다.
문득 글쓰기 수업에서 작가로 살아가려면 편독을 지양하고 생각의 틀을 깨야한다는 가르침이 떠올랐다. 읽기와 쓰기 모두 경지에 이르지 못한 나로서는 좋아하는 책을 읽기만도 늘 시간이 모자라다. 사춘기 때 전학 가서 불혹이 되어 다시 만난 친구 대하듯 나는 꽤 오랜 세월 책과 데면데면했다. 그 시간들에 대한 후회를 멈추지 못하면서 나는 또다시 낯선 분야의 책들에게 낯을 가린다. 친해지려면 굳은 결심이 필요한 관계도 있는 법인데 말이다.
'소리소문 이달의 베스트셀러' 1위인 소리소문 블라인드 북에 관심이 쏠렸다. 단지 서너 줄의 해시태그만 보고 마음에 드는 책을 집어 들면 된다. 나의 현재와 가장 맞닿은 해시태그는 무엇이었을까.
#마음을 매만지는 법
#걱정은 선반 위에
#나를 믿어볼 용기
#마음에 '콕' 박히는 문장
두 권을 두고 한참을 저울질하다 신중히 고른 한 권의 책. 결제하자마자 바로 열어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 설렘을 되도록 오래 간직하고 싶었기에. 설렘의 여운마저 시간이 데려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싶었다.
어느덧 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켰다. 나도 모르게 두 시간 가까이 소리소문에서 머무른 셈이다. 섣불리 뜯지 못한 설렘을 조심스레 옆좌석에 내려두고 차 시동을 켰다. 후드득, 빗방울이 차창 밖을 두들기기 시작했지만 웬일인지 잘 부르지 않던 콧노래가 또 절로 나왔다.
집에 도착해서도 설렘은 여전히 내 곁에 있었다. 학원을 마치고 귀가할 아이를 기다리며 '소리소문 블라인드 북'의 겉표지를 조심스레 뜯었다.
'아!'
어쩐지 #걱정은 선반 위에라는 문구가 친숙하더라니. 나는 또 낯설기보다 친밀한 것을 고른 것이다. 내 마음이 들통난 듯한 문장들 때문에 작가님과 내가 감성의 도플갱어일지 모른다고 착각할 뻔했던, 그래서 다 읽고도 쉬이 놓아주지 못하고 침대 머리맡에 내내 올려 두었던.
이렇게 난 『고쳐 쓰는 마음 (이윤주 산문)』을 두 권째 갖게 되었다.
여전히 알 수 없다. 거센 태풍처럼 스쳐간 우울과 무기력의 원인이 가을이었는지. 일조량 감소로 세로토닌이 줄고 멜라토닌이 늘어 생기는 계절성 우울증(계절성 기분장애)이라고 진단을 내리면 단순하겠지만, 그 시간을 견뎌야 했던 나는 복잡 미묘함에 시달렸다.
이제 미로 같은 우울의 터널 끝에 흰 점이 보인다. 흰 빛은 점점 커지다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결국 기분 전환을 위해 내게 필요했던 건 시간이었다. 고민할 시간, 딴짓할 시간, 맘껏 느려도 될 시간, 나 자신과 독대할 시간. '소리소문 없이 나 홀로 휴가'를 택한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