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당퐁당 100편 글쓰기 49화
등기소에서 발급받은 서류를 거래처에 전달하고 막 시동을 걸어 출발하려던 찰나였다. 휴대전화 블루투스 스피커를 타고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당황스러움과 다급함이 묻어났다.
"어떡하지. 서류에 이름이 잘못됐데요. 내가 잘못 알려줬나 봐."
다시 핸들을 돌려 등기소로 향했다. 새로 발급받은 서류를 거래처 앞에서 기다리던 그의 손에 직접 들려주고 나서야 회사로 출발할 수 있었다. 빨간불이 초록불로 바뀌길 기다리면서 조여있던 긴장감이 느슨해지던 때였을까. 우우웅- 가방 안에서 불길한 진동음이 느껴졌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진짜 미안해요. 이번엔 다른 정보가 잘못 됐다고 하네. 다시 발급 좀 부탁해요."
어쩜 이리 한 치의 예상도 빗나감이 없을까. 정말이지 조마조마함을 현실로 만드는 탁월한 재주가 있다.
그날 오후 내내 머릿속에 새겨진 키워드는 '삽질'이었다. 나에게 삽을 쥐어준 자는 한 번만 방문할 장소를 세 번이나 들르게 함으로써 내 걸음수와 자동차 주행 거리를 늘려줬다. 하루 6,000보 이상 걷기 힘든 사무직에게 엉덩이를 떼고 움직일 기회를 주다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첫 번째는 서류에 기재해야 할 이름, 두 번째는 주소, 세 번째는 발급 서류의 매수. 오류를 한 번에 발견하지 못하고 순차적으로 깨닫는 바람에 오던 길을 여러 번 되돌아가야 하는 비효율이라니. 길에서 허비한 시간이 아깝기 그지없어서 가슴속이 용암 끓듯 부글부글했다.
그의 깜빡거림 때문에 궁지에 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녔지만 이번만은 도저히 참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년 참았으면 인내심이 바닥날 때도 됐지. 아무렴. 그렇고 말고. 오늘 하루 잘 버텨보자던 아침의 다짐이 무색해지고 또다시 사직서가 간절해진 날이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품고 있다는 사직서. 내 품 안에도 있다. 그것도 매일 펼쳤다 다시 넣기를 반복해서 너덜너덜 찢어지기 일보 직전인 채로.
<첫 키스만 50번째>라는 영화에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주인공이 나온다. 매일 사고가 났던 10월 13일 일요일로 되돌아가는 그녀의 기억. 그럼에도 사랑에 빠진 남자 주인공은 하루하루 자신이 직접 찍은 비디오테이프를 보여주며 그녀의 기억이 돌아오도록 돕는다. 매일을 첫 만남처럼 달콤한 데이트를 이어가는 두 주인공.
낭만과는 한참 거리가 먼 현실에서 로맨틱 코미디를 떠올리다니. 아직은 견딜만한 걸까. 사직서를 꺼내 들기엔 이른 때일까.
그는 보고받은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하루 전에 오고 간 얘기마저도. 메신저로 서면 보고를 했든, 전화로 유선 보고를 했든지 간에 말이다. 망각이 불러온 정보의 소실은 불안과 의심을 부추긴다. 그러므로 같은 일을 매번 새롭게 설명해줘야 한다. 일을 해놓고도 안 했다는 의심을 받기 싫다면 말이다.
그는 주어와 목적어를 뺀 동사만으로 지시어를 구사한다. 마치 자기 머릿속에 들어가 말하지 않은 의도를 다 알아채주길 바라는 것처럼. 그럴 때마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궁예의 '관심법'을 빌어서라도 그의 마음을 읽고 싶다.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학창 시절에 배운 육하원칙을 까맣게 잊은 듯한 그분에게 간곡하게 요청드린 적이 있다.
"부디 주어와 목적어를 정확히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야 제가 오차 없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습니다."
"네, 미안해요. 앞으론 그럴게요."
대답은 잘한다. 하지만 앞서 써두었듯이 그는 전날 보고한 내용도 잊어버리는 사람이다. 이 역시 다음날 되면 잊는다. 또다시 되풀이되는 실수. 실수. 그럴 때마다 귓가에 자동재생되는 노래가 있다. 김종국의 <제자리걸음>.
<첫 키스만 50번째> 남자 주인공만큼의 애정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나는 매번 그의 기억을 되돌려놓아야 한다. 필사적으로. 왜냐하면 그는 나의 고용주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다. 차라리 건망증과 실수를 그의 정체성이라고 인정하면 속이 편할까. 덕분에 나는 한 번에 마칠 간단한 일을 여러 번 다시 해내는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월급 받으면서 끈기 훈련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일거양득이다.
'지금 나를 골탕 먹이는 건가?'
한때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상식을 벗어나다 못해 어이 실종인 실수를 연거푸 해서 부아가 끓게 만드니까.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의아함이 짜증으로, 짜증이 분통으로, 분통이 의심으로 바뀌는 데는 이 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쯤 되니 그의 모든 경영 방식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문제는 경영진에 대한 불신이 업무에 대한 몰입과 실질적인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의 성과를 통해 성취감을 얻는다'는 지나간 먼 얘기처럼 아득할 뿐이다. 지금 견디고 버티는 이 시간이 물경력에 지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든다. 생계를 위해 하는 일에서 성취감과 보람까지 찾는 게 배부른 소리인 걸까.
'나는 왜 내 일을 눈곱만큼도 좋아할 수 없는 거지?'
이삼십 대에 했어야 할 고민을 지금에 와서 하는 게 타당한 지 모르겠다. 마흔을 넘긴 워킹맘이 이직을 고민한다는 건 자칫 경력 단절의 위험을 감수해야 할 만큼 고용 시장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인정하기 싫어도 불경기임에 틀림없다. 불과 이 삼 년 전에 즐겨 찾던 카페나 음식점이 문을 닫고 건물 곳곳에 '임대'가 붙었다. 더군다나 제주는 육지에 비해 사무직에 대한 수요가 터무니없이 적은 곳이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지금 자리를 보전하는 것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정치질과 기싸움 따위 없는 유순한 성품의 사람들, 근무 시간 조정이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불경기로 말미암은 수 차례의 보릿고개에도 불구하고 따박따박 거르지 않고 입금되는 급여. '미안하다, 고맙다'를 수시로 건네는 대표님.
직장에서 참 듣기 귀한 말 중 하나가 '미안하다'인데 이곳 회사에서는 제법 듣고 있다. 본인의 불찰에도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과거의 상사들과 다르게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기까지 했으니. 오히려 고마운 마음마저 들어서 '사람이니까 실수할 수 있지'라는 이해심이 절로 나오던 시절이 있긴 했다.
초심을 잃은 건지, 한 곳에 오래 머무르다 보니 권태가 모든 일에 싫증을 불러일으킨 건지, 아니면 글 쓰는 일이 더 좋아서 본업이 미워진 건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한데 모아지지 않는 생각들 속에 허우적대다 길을 잃는다. 부쩍 감정 기복이 심해진 이유일 테다.
친정어머니는 심란한 마음을 두고 '속 시끄럽다'는 말씀을 하곤 했다. 시끄러운 속을 들키지 않으려다 보니 도통 글을 못 썼다. 쏟아낼 수 있는 문장이 온통 서걱거리는 자갈 투성이라 걸러낼 엄두가 나지 않아서.
솔직하지 못해 서글픈 글을 쓰고 싶지 않은 마음과 글에라도 기대고 싶은 마음이 엎치락뒤치락하다 오늘은 후자가 이겼다. 글에라도 기대야겠다. 날 것의 감정을 회쳐서 쓰는 글이 그럭저럭 읽어볼 만하다면 좋겠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