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가을소풍

퐁당퐁당 100편 글쓰기 50화

by 뵤뵤


어떤 하루를 보내게 될 거란 예감은 기지개를 켜며 거실 창문 앞에 다가설 때 시작되곤 한다. 구름이 많은지, 적은지, 적다면 하늘과 수평선의 색이 선명한지 흐릿한지. 저 멀리 산방산과 송악산에 드리워진 베일의 두께에 따라 미세먼지 농도를 가늠해보기도 하면서. '나는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구나' 제주에 살면서 깨닫는 중이다.


단순히 맑고 흐림보다 자연의 채도에 반응한다. 대기질이 좋은 날이면 만물이 지닌 본연의 색이 워낙 찬란하여 눈을 똑바로 뜨고 다니기 어렵다. 그래서 녹내장 판정 이후로 자외선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선글라스를 한 몸처럼 지니게 되었다. 만물을 타고난 빛깔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남회색 렌즈 너머로 감상해야 한다니 울적하긴 해도 어쩌랴.


그럼에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구석구석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는 쨍쨍한 맑음이 좋다. 그런 날엔 왠지 걸음걸음마다 미래를 낙관하게 된다. 기분이 곧잘 날씨를 따라가는 이유다.


그날은 아침 풍경을 살피다가 소풍을 가기로 다짐했다. 왜냐하면 하늘은 화창했지만 바람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얗게 거품 낀 파도의 너울을 보았고, 집 앞 가로수들이 몸을 떠는 걸 보았다. 머지않아 휑하니 남게 될 앙상한 가지들이 눈앞에 그려졌다. 겨울이 코 앞에 다가온 거다. 어쩌면 올해 은행비를 맞을 수 있는 마지막 날될지 몰랐다.






수영 강습을 마친 아이를 태워 햄버거 가게로 갔다. 허기 진 아이가 욕심껏 고른 햄버거 세트를 포장해 들고 100살이 넘은 은행나무로 향했다. 기대했던 대로 바닥은 온통 노란 카펫이 깔려 있었다. 쏴아아 부는 바람에 오소소 떨어지는 은행잎이라니. 12월에 느껴보는 때늦은 가을 정취였다.


"우와, 진짜 멋지다!"


아이가 내지르는 감탄사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실로 이 년 만에 보는 풍경이었다. 작년만 해도 연둣빛이 가시지 않은 낙엽이 태반이라 아쉬웠다. 은행잎이 샛노랗게 물들 틈을 기다려주지 않고 대뜸 내리쳤던 칼바람 탓이리라.


좋은 풍경을 놓치지 않고 아이에게 선사할 수 있어서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두 사람이 마주 서서 양팔을 한 아름 뻗어야 안을 수 있는 거목. 대장군처럼 믿음직스럽게 거목을 지키는 돌하르방. 그 뒤로 펼쳐진 무성하게 영근 주황빛 감귤밭.





우리도 이 한 폭의 그림 속에 뛰어들어 볼까 싶었다. 은행나무 가지 아래 평탄한 바닥에 돗자리를 펼쳤다. 들이치는 바람 탓에 돗자리가 호떡처럼 뒤집힐까 바삐 신발을 벗고 두 다리를 쭉 뻗었다. 중력으로 지그시 눌러준 자리 한가운데에 햄버거와 음료수를 놓고 아이와 나는 '금강산도 식후경'을 읊으며 소풍을 즐기기 시작했다.





머리, 어깨, 다리, 사이드 메뉴로 시킨 양배추절임, 제로 사이다의 빨대 위. 은행잎은 착지점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내려앉았다. 나풀나풀 가랑비처럼 내린다면 낭만의 완성일텐데.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달라서 소낙비처럼 바쁘게 착지하는 은행잎을 연신 걷어내며 햄버거를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엄마, 내 햄버거가 은행버거가 됐어."

"에잇, 지지다, 지지. 털어내자."


낙엽이 예쁘긴커녕 성가셔진 와중에도 미소가 번졌다. 이 또한 추억인걸 알아서. 바람의 세기와 은행비가 내리는 속도는 인력으로 어찌하지 못하니까. 예기치 않은 상황이 뜻하지 않은 즐거움을 가져다줬다.


자기 얼굴만 한 햄버거 하나를 뚝딱 먹어 치우고 기분 좋아진 아이가 뜬금없이 농을 던졌다.


"엄마, 택시 기사님들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은 뭐게?"

"뭔데?"

"타이거. 타, 이거."


푸스스 풍선에 바람 빠지듯 웃음이 나왔다. 언어유희를 좋아하는 나도 질 수 없지.


"형이랑 아우가 싸우는데 세상 사람들이 다 아우 편만 들어. 이런 상황을 뭐라고 하게?"

"뭐지? 모르겠어."

"형. 편. 없. 는. 세. 상."


애 아빠가 들었다면 어이없는 말장난에 입을 다물지 못했을 텐데.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음이 난다는 소녀들처럼 아이와 나는 고개가 뒤로 젖혀지도록 꺄르르르르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렇게까지 웃을 일이 아닌데도 유난히 웃음이 헤픈 날이었다. 날씨가 좋았고, 풍경이 다 했고, 햄버거가 맛있었고, 우리는 행복했고.


"어? 엄마,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없어."


정신없이 은행잎을 치우며 먹고, 정신없이 웃다 보니 그만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단 걸 깜빡했다. 다시 꺼내 본 영수증에는 분명 아이스크림이 쓰여있었다. 아마도 점심시간이라 정신없이 바빠 보였던 직원이 실수로 빠트린 듯했다. 식후 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을 생각이었던 아이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다시 되돌아가자. 어쩔 수 없지, 뭐."


'12월의 가을 소풍'이 근래에 실종된 내 안의 긍정을 끄집어낸 걸까. 매사 이런 마음으로 살면 참 좋을 텐데. 누구보다도 간절히, 단순하고 쉽게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다. 고운 풍경으로 눈 호강하고 아이와 함께 웃으며 충전했던 시간의 효력이 눈 녹듯이 사라지지 않기를, 순간의 행복을 오래도록 붙잡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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