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당퐁당 100편 글쓰기 51화
글을 쓰기 위해 2.9kg짜리 노트북을 짊어지고 카페로 간다. 휴대의 편리함을 누리고자 산 물건이 3kg에 육박하다니. 가방을 든 팔과 어깨가 뻑적지근할 때마다 하필 왜 이 애물단지를 고른 건가, 과거의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중고치고 그다지 저렴한 가격도 아니었다. 게다가 키보드 세 개가 쉽게 눌러지질 않아서 오타를 유발하기까지. 한숨이 나오지만 이쯤 되면 인정해야지. 실패한 소비였다는 걸.
노트북을 고르고 구매 버튼을 누르기까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은 거 같다. 만약 오랜 기간을 다른 제품과 비교해 보고 따졌더라면 후회를 덜었을까. 잠깐의 시간을 아끼려다 오래갈 불편함을 얻은 거 같아 속이 쓰리다. 문득 시간을 아끼려다 돈을 허비하고, 돈을 아끼려다 시간을 허비했던 숱한 경험들이 떠오른다. 그렇게 몇 번의 경험을 되짚다 보면, 결국 한 문장이 떠오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은 곧 돈이라는 말.
그 말 앞에서 나는 쉽게 고개를 끄덕인다. 어린 시절에는 고루한 잔소리처럼 들렸던 ‘시간은 금이다’라는 명언이,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서다. 근로소득자가 되고서 실감했다. 근로계약서란 결국 나의 시간을 돈과 교환하겠다는 동의서라는 사실을. 세 번의 학부모 참관 수업, 한 번의 운동회, 막 학교를 마친 아이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한낮의 여유. 월급을 대가로 저당 잡힌 것은 노동의 시간에 밀려난 장면들이었다. 들어가지 못했고, 일굴 수 없던 수많은 추억.
시간이 돈과 같다는 전제 앞에서 이따금 가성비를 따지며 초라해지는 나를 본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저마다 상승장의 기운을 받아 주식 이야기로 들떠 있을 때 나만 입술을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공평하게 주어지는 매일인데 서로의 시간은 판이하게 흐르는 거 같다.
그들이 출퇴근길에 비트코인과 미국 증시에 관한 팟캐스트를 들을 동안 나는 뭘 했나. 클래식 FM 라디오와 좋아하는 작가들이 나오는 유튜브를 재생해서 들었더랬다. 누구는 우량주와 금을 사 모은다는데 나는 책과 글쓰기 수업에 시간과 돈을 지불했다. 글쓰기가 본업이 아니면서, 글 짓는 일로 식구들 밥도 지어보겠다는 간절한 포부를 가져본 적 없으면서 그러고 지냈다.
손익을 따져보면 밑지는 투자인 게 분명하다. 지금까지 수익은 제로인데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비용을 지출하고 있으니 말이다. 직장에 종일 얽매이지 않고도 시간이 절로 돈을 불려준다는 복리의 마법이 전혀 욕심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 현실은 근로소득에 전적으로 기대어 글쓰기로 갑갑함을 해소할 따름이다.
이러니 가끔 머리가 차가워질 때면 속으로 묻게 된다.
'아무리 좋아서 하는 일이라지만 눈에 띄는 목표나 성과가 없다면 무용한 건가? 어쩌면 가성비 낮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비교가 불행의 씨앗이란 걸 알지만 속 시원히 떨치지 못하는 근심을 안고 산다.
제한된 시간은 인간을 끊임없이 선택의 갈래길 위에 세운다. 올해 나는 글쓰기를 삶에 본격적으로 들여놓고 그것이 습관이 되도록 아등바등했다. 일과 육아에 읽고 쓰는 일이 뒷전이 되지 않도록 자투리 시간을 마련하느라 늘 종종거렸다. 돌이켜보니 매일이 저울질의 연속이었다. 잠시 공백이 생길라치면 독서할지, 필사를 할지, 아니면 짤막한 초고를 남길지 고민했다. 후회가 가장 적을 선택을 하느라 머릿속이 복작거릴 때가 많았다.
어렵게 낸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길 바라는 마음 때문에 결정을 내리기 신중해졌다. 완벽한 휴일을 위해 수일 전부터 장소를 물색하며 고심하니까 말이다. 최선이 뭘까 저울질하느라 망설이는 동안에도 계속 흐른다, 시간은. 야속하게.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 욕구가 커질수록 따지는 조건이 늘어난다. 채광과 조명이 적당한지, 옆 자리의 대화 소리가 테이블 간의 경계를 넘나들 정도로 쩌렁쩌렁하지 않은지, 노트북의 전원을 켤 콘센트가 가까이 있는지. 카페에서 앉을 자리를 결정하는 기준이 하나둘 더해지듯 말이다.
'갈수록 취향은 촘촘해지는데 여유가 없어서 요구사항만 분에 넘친다면 어쩌지.'
예전에는 개의치 않던 사소한 문제에 부쩍 민감해진 자신을 발견할 때면, 까다로움을 차곡차곡 나이에 비례해 쌓는 중은 아닐까 걱정된다.
나는 줄곧 너그럽고 다정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시간으로 사치 부리기를 소원하는지 모른다. 인심이 곳간에서 나오듯, 다정함이 여유에서 나온다는 걸 알게 되니 그렇다. 쫓기듯 바쁠 때는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볼 경황이 없었다. 당장 눈앞의 일을 해치우느라 주변 사람들에게 무심했던 순간들이 잊히지 않고 거스러미처럼 남았다. 다정함에 소홀했던 찰나가 두텁게 쌓여 오해를 짓는다는 걸 깨닫게 됐다. 시간 부자가 된다면 지금보단 더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요즘이다.
본디 시간은 만물에 공평하며 자연계를 지배하는 원리와 법칙이 흐르는 바탕이다. 지구상에 태어난 수많은 생물들은 그저 시간의 흐름에 생을 맡긴 채 타고난 대로 주어진 대로 살아간다. 유독 인간만이 시간에 대해서 별나게 구는 것 같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며 번뇌에 빠지고 항산화, 항노화를 외치며 역주행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 역시 별 수없는 인간이라 시간 때문에 괴로워하고, 시간 때문에 울고 웃는다.
2025년, 일부러 시간을 써서 글을 썼다. 해를 거듭할수록 재생속도가 빨라지는 세월 앞에서 셀 수 없는 순간들이 손쓸 도리 없이 증발해 버린다. 나에게 글이란 그 장면들이 허무하게 날아가지 않도록 친절한 주석을 추에 엮어 매다는 일이다. 새해에는 올해보다 좀 더 많은 장면을 붙잡고 싶다. 일 년 후, 이맘때쯤 한 해를 돌아보는 글 한 편을 남긴다면 마지막 문장은 부디 이랬으면 좋겠다.
'읽을 만한 가치 있는 글을 쓰고 나누느라 가치 있게 시간을 보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