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당퐁당 100편 글쓰기 52화
참으로 오랜만에 친정 식구들과 크리스마스를 지냈다. 제주에 놀러 온 손님맞이로 성대하게 성탄절을 보냈더니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28일부터 31일인 오늘까지 숨만 쉬었을 뿐인데 시간이 훅, 촛불처럼 하나씩 꺼져갔다. 아, 여태 송구영신하는 각오를 다지지 못한 탓일까. 미련이 남는다. 준비 없이 코 앞에 맞닥뜨린 새해가 두렵기도 하다.
나름 애썼다고 자신를 다독이던 순간이 분명 있던 거 같은데. 잘 해낸 경험과 부족함을 인지했던 경험이 엎치락뒤치락하다 때마침 기분이 별로인 탓에 자괴감 들던 기억이 지분을 절반 넘게 차지해 버렸다. 새벽에 울린 알람을 끄고 침대에 다시 눕기를 자처한 오늘의 내가 성실했던 과거의 나를 현재로 데려오지 못해서일까.
몸이 무거워 일어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다만 정신이 무거웠다. 당장 1월 1일부터 시작하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마구 뒤섞인 채 엎질러진 레고 조각처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몸은 천장을 향해 똑바로 누워 눈을 감고 있지만 속은 오만가지 생각으로 시끌시끌한 상태라 더 피로해지기만 했다. 에잇, 이불을 발로 걷어차며 벌떡 일어났다. 이럴 땐 써야 한다. 주제는 2025 연말정산, 마감은 오늘 밤 자정,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기 직전까지 말이다. 올해를 마감하는 글을 새해로 미루다가 유종의 미가 상실되는 불상사가 일어나선 안된다.
틈틈이 애써왔던 시간에 도장 찍듯 남겨뒀던 기록과 사진으로 다급하게 올 한 해를 돌아본다. '타임스탬프' 애플리케이션 속 격자무늬로 나열된 사진들을 엄지로 밀어 올리는 동안 성취의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마음 정중앙에 버젓이 자리 차지하던 자괴감이 다행히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권태롭고 나태했던 순간이 없지 않지만, 그땐 그럴만했다. 내려놓고 쉬던 날이 모여 힘차게 튀어 오를 구름판이 돼주었다. 유리처럼 깨지기 쉽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보려고 아등바등했던 때가 분명 며칠이라도 더 많았으니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1년 동안 53권
월평균 4.4권
한 달에 한 권 읽기도 버겁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다. 그때는 독서가 우선순위가 아니었으므로. 언제든 쉽고 간편하게 팝콘처럼 집어 먹을 콘텐츠가 유튜브와 OTT 세상 속에 널렸으니 말이다. <오징어 게임>조차 유행을 놓치고 뒷북으로 보던 사람이라 책 읽을 시간이 없단 얘기를 잘도 천연스럽게 하고 다녔다.
작년부터 독서 인증이라는 시스템에 나를 욱여넣고 1일 1독을 시도해 보니 깨달았다. 책 읽을 시간은 생기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였다. 관공서나 은행에서 대기표를 뽑고 기다릴 때,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해 친구를 기다릴 때, 아이 학원 수업을 마치길 기다릴 때. 잠깐 무료해지는 틈에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책을 펼치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욕심내서 한 번에 많이 읽지 않아도 되며 하루 한 장이어도 괜찮다, 생각하니 부담이 없었다.
틈새 시간을 공략하기 위해 각지고 무거운 가죽 가방이 아니라 품이 넉넉하고 가벼운 천 가방에 책 두세 권쯤을 넣고 다니게 됐다. 왜 두세 권이냐면 나는 열렬한 병렬 독서 추종자이기 때문이다. 제주 날씨처럼 변덕쟁이라서 그날의 심경에 따라 읽고 싶은 책이 다 다르다. 그래서 선택할 기회를 마련해둔다. 매일 보따리장수처럼 축 처지고 뚱뚱한 가방을 메고 다녀서 어깨가 결리는 게 부작용이긴 하지만. 장점이라면 명품 가방이 더 이상 탐나지 않다는 거랄까. 여러 권의 책과 휴대용 독서대를 꺼내기 쉽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예쁜 천 가방에 눈을 뗄 수 없는 요즘이다.
53권의 책을 내 것으로 꼭꼭 씹어 소화했다고 말한다면 순전히 거짓말이겠다. 인상적인 문장을 읊어보라면 입도 벙긋 못 하고 다시 책을 뒤적여야 할 정도로 상당한 부분을 기억하지 못한다(이래서 독서일지를 쓰나보다). 다만 우연히 만난 문장 덕에 울고 웃던 뭉클함은 잊지 않고 남았다. 그래서 올해 최고의 책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딱히 한 권을 꼽을 수 없다. 시시때때로 불안과 번민을 잠재워준 책들은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모두가 인생 책이었다.
시아버지와 작별을 고하던 즈음, 생의 유한함과 존엄한 죽음이 화두였던 때는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를 읽으며 눈물 흘렸고, 견디고 버티는 삶에 넌더리가 날 때쯤 『인생』과 『스토너』를 만나 투정질해 대는 마음을 달랬다. 원인 모를 우울감 때문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을 땐 이윤주 작가의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와 『고쳐 쓰는 마음』으로 나 같은 사람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서 외롭지 않다며 위안 삼았다.
장르는 소설과 에세이가 주를 이뤘다. 대체로 팍팍한 현실 속에 마주한 어려움을 세심한 심리 묘사로 그려낸 문장에 탄복했다. '나는 언제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부러움과 존경심을 품고 책장을 넘기곤 했다.
새해 첫 달 동안 기어코 매일 읽을 속셈으로 <브런치 독서챌린지>를 신청했다. 알람까지 맞춰놓고 신청 버튼을 누른 순간부터 챌린지 달성에 성공한 것처럼 성급하게 배가 불렀다. 26년에는 고전과 비문학들도 골고루 읽어볼 참이다, 라고 각오를 보태보지만 아마 올해보다 한두 권 더 읽게 되거나 그보다 못한 수준에 그칠지 모르겠다. 올해만큼 읽는다면 그것 나름대로 다행일지도. 부디 다양한 장르를 편견 없이 읽으며 유연하고 폭넓은 사고를 하게 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