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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phapha Nov 11. 2019

모두에게 봄날이 온다

행복은 스스로 찾는 것

작년 말, 엄마 아빠가 늘 그래 왔듯 일방적인 통보로 나를 당황케 했다.


"엄마 시골로 내려갈 거야. 일도 이제 지긋지긋하고, 아빠 매일 술 먹고 일하기 싫어하는데 일 하라고 하는 것도 지쳐"

대부분의 일들을 가족과 상의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부모님이긴 했지만 이번 통보는 좀 달랐다.
부모님은 20대가 되기도 전부터 해왔던 일을 45년 가까이해오신 분들이고, 계속 도시생활만 해오셨던 분들인데 갑자기 귀촌이라니.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어 자초지종을 듣기도 전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엄마 혹시 갱년기 아니야? 엄마는 폐경도 너무 일찍 왔는데 일 하느라 그럭저럭 넘어갔다지만 생활력 강한 엄마가 이런 얘기를 할리가 없잖아."

요새 짜증이 잦았다는 아빠의 제보와 난생처음으로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한 엄마의 소신, 그리고 그 무렵 엄마 친구들이 겪고 있던 갱년기 등 정황상 이번 통보는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나를 22살에 낳은 뒤 일주일을 채 쉬지도 못하고 지금까지 일만 해왔다.
23살의 아빠도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입에 술도 대지 못했던 젊은 시절의 아빠는 사업실패와 건강상의 이유로 술을 찾기 시작했고 그렇게 30년이 넘게 매일 소주 1병을 벗 삼아 살아왔다.
스물셋과 스물둘.
지긋지긋한 가난과 삶의 생계 앞에서 두 분은 어떤 희망과 미래를 꿈꿔왔을까.




동생과 나는 부모님의 시골생활에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겹도록 일만 해왔으니 이제 좀 마음 편하게 지냈으면 한다고.
한편으로는 부모님과 넷째 이모 내외도 함께 내려와 살게 되면 서울에서 사는 것보다 덜 외로울 테고 아프더라도 서로 챙겨줄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그냥 늙지 않는다.
홍역 같은 고통과 방황의 시간을 거쳐야 변화무쌍한 감정의 비구름 속을 통과해야 비로소 늙음을 맞이할 수 있다.”
- 영화관을 나오면 다시 시작되는 영화가 있다, 김호영




시골의 겨울 바람이 매섭다




"엄마 나 구정 때 이틀은 못 있을 것 같고 하루만 있다가 올라올게"


"안 와도 돼. 지금 집이 딱 공중화장실 같아. 아직 물도 깨끗하지 못하고. 사위 부끄럽게... 다 완성되면 그때 내려와"

"내가 잔소리할까 봐 그렇지? 일단 내려갈게. 그래도 명절인데 어떻게 안가"

"그래. 그럼 그렇게 해. 할머니네 집에서 자도 되고..."

막상 내려가 보니 엄마의 집 앞에 서서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아직도 손볼게 많은 것은 당연한 것이고, 공중화장실 같다는 엄마 말도 이해가 가고, 엄마가 진짜 여기 와서 행복할까? 넷째 이모가 내려오시게 되면 더 즐거워지겠지? 지루해지면 엄마는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나는 나중에 어떤 노후를 살게 될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점심밥을 치우고 할머니 댁 낡은 식탁에 엄마와 나 이모가 둘러앉았다.

"이모, 이모는 시골에서 살고 싶어서 내려온 거야?"
"... 그냥 서울 살아도 노후도 걱정이고, 아들 둘 결혼하고 나면 이후도 그렇고, 살고 싶어서 내려온 거는 아니지..."
먹고 있던 귤이 썼다.



다음날 아침상을 준비하다가 엄마랑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엄마, 나는 원래 엄마 아빠가 일 그만두면 우리 집 근처에서 같이 살면서 나랑 문화센터도 다니고 도서관 프로그램도 배우고 그래야지 생각했었어. 그런데 갑자기 너무 빨리 일을 진행해버리니까... 아까 엄마 집 보고 마음이 좀 속상했어. 집이 이상해서 그런 게 아니고 여기 와서 할머니랑 삼촌 뒷바라지하면서 다시 고생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통에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아무튼 엄마 언제든 시골생활이 지겨워지고 못 견디겠으면 꼭 올라와서 우리 집에서 같이 살자. 돌아갈 곳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알겠지"
엄마는 그런 일은 없다고 했다. 단호했다.
그런 일이 있더라도 절대 그럴 수는 없다는 말로 해석되었다.
자식에게 신세 질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진 엄마에게속상했다.
조금 뻔뻔해져도 되는 건데, 이만큼 키워줬으니 나중에는 날 좀 돌봐다오 할 수 있는 건데 엄마는 그럴 일 없다고 단언했다.





자식은 무엇이길래 부모는 평생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걸까.
자식과 부모의 적당한 거리는 무엇일까.
4대가 함께 둘러앉아 떡국을 먹는 동안 한 명 한 명 가족들의 얼굴을 둘러본다.
문득 사람의 生에 대해 궁금해진다.
귀가 안 들려 입모양으로 말을 이해하는 아흔셋 외할머니의 유일한 일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자식들의 입모양을 통해 대화를 이해하고, 밥통 코드는 잘 빼고 있는지, 화장실 불은 끄고 나왔는지, 정시에 밥상을 차리는 지를 확인하는 일이 전부라면 할머니의 말씀대로 노인은 살아있는 송장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아픈 외숙모와 수십 년을 떨어져 지내며 할머니를 지금까지 돌봐드렸던 삼촌의 밥상에도 이제 봄날이 찾아드는 건가.
몇 년간 끊었던 담배를 다시 찾아 문 아빠는 지긋지긋하다 했던 서울 생활을 담배연기에 담아 추억하고 있는 걸까.
삼시세끼 공장 사람들 밥하는 게 지겹고 일하기 진절머리 난다고 했던 엄마는 이곳에서 더 많은 인원의 밥반찬을 고민하고 청소와 집안일을 하며 지내는데 진짜. 괜찮은 걸까.



젊었던 시간을 지나온 게 아니라 쌓아왔다고 생각하면 인생은 소멸이 아니라 저축이다.
- 인생은 고양이처럼, 아방




연휴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뒤숭숭한 마음으로 아침에 일찍 가족 단톡 방에 긴 문자를 남겼더니 동생이 카톡으로 한마디 한다.
6시도 안됐는데 너무 이르지 않느냐고. 엄마 집을 먼저 방문한 사람으로서 동생에게 훈수를 뒀다
할머니가 밥을 6시 30분에 먹는데 진즉 일어나 있지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고.
그제야 동생이 "아." 짧은 말을 내뱉는다.




설날 아침 한상에 앉아 떡국을 뜨며 그런 생각을 했다.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집안의 대소사를 밥상에서, 한 공간에서 나눌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건 아주 행복한 삶이구나.
그렇게, 모두에게 봄날이 왔다.



@byphap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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