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씨, 30세가 넘어서 다시 학생이 된다는 게 사실 설레기 보다는 두려워. 특히나 한국이 아닌 낯선 독일에서. 이건 내가 나름 내 20대의 젊음을 갈아넣어 쌓아온 것들, 예를들면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드디어 얻게 된 “안정감”을 내려놓아야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직장인들은 알거야. 매달 입금되는 월급이 얼마나 큰 안정감을 주는 합법적인 마약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선택을 한 이유는 단 하나야. 더 나은 내가 되고싶어서.
30년이 넘게 살면서 나는 많은 것에 소극적인 자세로 임해왔어. 언제나 안전한 것을 선택해왔고 실패가 두려워서 하고싶은 일이나 원하는 것이 있어도 지레짐작 안될거라고 생각하고 포기해버렸지. 장미씨가 답답해하던 그 작은 상자가 나에게는 안전지대로 느껴졌었어. 그래서 다양한 경험과 실패가 허락된 20대때도 나는 도전하기보다는 그 안에 머무르려고 했지. 장미씨가 독일행을 권했을 때도, 집안 사정상 두명이나 유학하는 건 부모님께 너무 부담이라고 생각해서 거절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워서 피하려고 했던 것 같아. 안전한 것을 선택한거지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그런데 그렇게 한 개, 두 개 외면해왔던 내 욕망들이 사라지지 않고 상자를 채우기 시작했어. 결국 난 꼼짝달싹 못하고 숨이 막히는 상태가 되어버렸지. 더 이상 상자는 내 안전지대가 되어줄 수 없었고 나는 어떻게 해서든 그 안에서 나와야만 했어. 그리고 그 때 장미씨의 마지막 출구가 나에게도 보였어 뒤늦게.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공항에서 자유를 외쳤던 장미씨랑은 다르게 나는 걱정을 한짐 지고 독일에 도착했어.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보다는 이 낯선 곳에서 내가 홀로 해내야 할 일들이 끊임없이 떠올랐고 안그래도 예민한 내 신경들은 모두 곤두서 있었어.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가장 근접한 예를 들자면 마치 엄청나게 무서운 공포영화를 봤을 때 머리털이 곤두서는 그런 느낌이랄까. 근데 그게 한 두시간 가는 게 아니라 계속되는 거야. 24시간. 상상이 가? 그리고 스멀스멀 내가 크게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닌지 의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어. 결국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수원 북문 점쟁이 할아버지가 했던 말까지 생각해 냈지. 점집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작은 이모님의 제안으로 가족 단체로 점을 보러 갔던 그 때, 은근 해외로 나가고픈 마음을 품고 있었던 나는 질문했지 “제가 해외로 나가서 사는 일이 생길까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점쟁이 할아버지가 말했어. “없어! 전혀 없어! 해외 나갈 사주가 아니야” 딱히 점을 믿는 성향은 아니지만 그 때 느낀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 그 때 그 순간이 떠오르니 오기가 생기더라. “두고봐, 독일에서도 잘먹고 잘 살아낼테니까!”
짐을 챙기기 시작했을 때 장미씨가 이민 가방을 추천해 줬지만 나는 나의 가녀린 팔로 그걸 혼자 끌고 이동할 자신이 없어서 평소 꿈꾸던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실천해보기로 결정했어. 20kg 남짓 정말 필요한 옷가지, 노트북, 작은 전기 밥솥만 챙겼는데도 이리저리 이동하려니 쉽지 않더라. 20대와 30대 체력의 차이일까. 겨우 겨우 앞으로 살게 될 쉐어하우스에 도착해서 짐 정리를 하는데 문득 내가 20대 때 용감한 선택을 했었더라면, 그래서 이 모든 걸 그 때 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더라. 이 모든 게 조금은 더 쉬웠을까? 지나간 시간 생각해서 뭐하리. 맨땅에 헤딩하는 것 처럼 살게 될 나의 늦깎이 모험이 장미씨의 모험만큼이나 의미있는 경험들로 가득해서 이전과는 다른 삶의 자세를 갖게될 수 있길 바라. 40대가 됐을 때 같은 의문을 갖지 않도록.
그래도 에너지가 넘치는 20대에 시작한 장미씨의 모험이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네. 모든게 다 장미빛이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