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아무 결정도 하지 않는 선택에 대하여

대답하지 않겠다고 대답한 날

by 서로빛


"그 부분까지는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대표는 눈살을 찌푸리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집요하게 되물었다.


"어떻게 도입하겠다는 약물의 기전을 모를 수가 있지? 그래도 자료는 준비한 거니까 생각을 한번 해보고 얘기하시지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준비해서 답하겠습니다."


"아니, 그래도 설명을 좀 해보지?"


모르는 건 모른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나와, 몰라도 그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답을 원하는 대표가 그 자리에서 부딪혔다. 그 순간 상무가 나섰다.


"이건 A가 B와 결합한 후, C를 억제시켜 질병이 진행되는 것을 억제하는 원리입니다."


사실 정확하진 않았지만, 대표가 듣고 싶어 하던 말이었다.


나는 노트북 화면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보고는 끝나고, 30분이 지났을 쯤 상무가 방으로 나를 불렀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추가적인 지시사항이 있을 줄 알고 노트북을 들고 상무 방의 회의 테이블에 앉았다.


"OOO 매니저, 이렇게 일하면 후배나 다른 사람들이 무시하고 욕해"


"…"


"그리고 어떻게 이 분야를 잘 모르는 대표한테 무시당할 수 있어?"


"…"


"요즘 뭘 잘못하고 있는지 내가 왜 화내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거 같아. 계속 이런 식으로 일할 거면, 나 앞으로 OOO 매니저랑 일 못 해."


말들이 꽤 직설적이었다.

10년을 같이 일한 상사였다. 내가 사원, 대리일 때부터 그분이 과장, 차장, 팀장을 거치던 시절까지.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순간에 늘 의지가 되었던 그런 분이었다. 그렇게 잘 아는 분이 나한테 처음으로 막말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빴다기보다는 묘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그리고 그 질문이 왔다.


"팀장 승진 하고 싶다며, 팀장 할 생각이 없는 거야?"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상무는 화가 난 듯 보였고, 나를 몇 초간 쳐다봤다.


뭔가 더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결국 한숨만 쉬었다.


"욕심이 진짜 없구나. 그냥 가봐."


나는 일어섰다. 의자를 제자리에 밀어 넣고, 뒤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그 이후로 한동안 우리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이미 많이 망가져 있었다.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가장 심했을 때였고, 약을 증량하면서도 하루하루 버티는 쪽에 가까웠다. 예전 같았으면 PPT 장표의 약물 기전, 임상 데이터, 매출 근거 하나하나를 검증하고 규제 리스크에 따른 이슈 까지 시뮬레이션해서 준비했을 것이다. 또한 질문을 미리 예측하고 스스로 먼저 공부했을 텐데, 그때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사실, 나를 괴롭히던 누군가 때문에 나사가 하나 빠진 채 일한다는 말이 맞았다.


그때의 "잘 모르겠다"는,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책임 회피처럼 들렸을 것이다. 의욕 없어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고 싶다고 말하기엔 내 상태가 너무 엉망이었고, 안 하겠다고 말하기엔 그 말이 가져올 결과를 감당할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쪽도 고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고르지 않겠다는 쪽을 골랐다.


도망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그때의 상황에서 더 망가지지 않으려고 버티기 위해 고른 말이었다. 적어도 나한테는 솔직했다. 지금 이 상태로는, 이 질문에 책임질 만한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한 거였다.


우리는 보통 빨리 정하는 사람을 유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물쭈물하는 건 약점처럼 보이고, "모르겠다"는 말은 준비가 안 된 사람의 변명처럼 들린다.


하지만 아무 결정도 하지 않는 선택이, 그 시기의 나를 지켜준 유일한 선택이었다.





2년이 지났다.


새로 부임한 대표에게 보고 자료 검수를 위해 메일을 보냈다.

보낸 다음날 아침 답장이 와 있었다.


별생각 없이 마우스를 클릭해 회신 메일을 여는 순간,

'OOO 팀장 수정 부탁드립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OOO 팀장이라는 호칭을 본 순간,

그때 상무 앞에서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던 나를 떠올렸다.


나는 이번엔 대답할 수 있었다.

메일 답장에 이렇게 썼다. "검토 완료했습니다."


R&D에서, RA(인허가), BD(사업개발) 및 전략기획까지 13년을 걸어온 길 위에서, 나는 다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돼 있었다.


판단을 유보했던 그 순간이, 결국 나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겨뒀다.




<판단하는 사람의 도구들> 이라는 주제로 연재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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