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을 2시간 만에 검증하는 법
"이 제네릭(복제약) 개발 어떻게 생각하세요?"
메일을 보는 순간, 거의 반사적으로 답이 떠올랐다.
아, 이건 시장성이 없다.
오리지널 특허는 이미 만료됐고, 경쟁사는 너무 많았다. 굳이 우리가 들어갈 이유가 없어 보였다. 정중하게 거절 메일을 쓰려고 했다. 커서를 답장 창에 올려두려던 순간, 메일이 하나 더 왔다.
"그럼 이 약을 오리지널로 직접 개발하는 건 어떨까요?"
잠깐, 하고 손이 멈췄다.
이 질환 치료제 중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정말 없을까?
예전 같았으면 여기서부터가 스트레스였다. 논문 찾고, 각 나라 허가 현황 정리하고, 경쟁약 임상 비교하고, 장단점 표 만들고. 하루는 그냥 날아갔다. 솔직히 말하면, 그 과정이 버거워서 처음 직감대로 “어렵겠습니다”라고 끝내버린 적도 적지 않았다.
요즘은 다르다.
GPT를 켰다.
"X질환 글로벌 가이드라인 상위 5개 치료제, 한국 허가 여부, 2024년 매출, 허가 임상, 현재 진행 중 임상 PFS/OS 데이터 포함해서 표로 정리"
30초 만에 표가 나왔다.
약물명, FDA 승인 연도, PFS 중앙값... 화면을 쭉 내렸다. 한국 허가 여부 컬럼을 눈으로 훑었다.
승인, 승인, 승인, 승인, 미승인.
근데 뭔가 애매했다. 미승인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개였다.
"이 중에서 한국 미출시 약물만 추려줘. 미국 FDA 승인연도랑 최근 임상 3상 결과 추가"
두 번째 표가 떴다. 이번엔 네 줄로 줄어들었다.
그중 하나, 2024년 승인된 약물의 반응 지속 기간(DoR, Duration of Response) 데이터에서 손이 멈췄다. 미국이랑 유럽에선 1차로 쓰이는데, 한국에서는 아무도 안 팔고 있다. 그리고 데이터가 좋았다.
마우스를 멈췄다. '어… 이거?'
이번엔 Gemini를 켰다.
"이 약, 한국에서 쓰이면 환자 수 얼마나 될까?"
숫자가 나왔다. 약 12,000명.
잠깐 계산기를 두드렸다. 급여가 된다고 쳐도, 연 매출은... 그렇게 크진 않다.
우리 회사 기준으로 보면 사실 애매한 숫자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숫자가 계속 머리에 남았다.
12,000명. 지금 이 사람들은 어떤 약을 쓰고 있지?
표를 위로 올려 기존 표준 치료제 데이터를 다시 봤다.기존 약의 반응 지속 기간은 3개월 남짓. 즉, 환자 대부분은 3개월 만에 병이 다시 진행된다는 뜻이다.
그럼 이 신약은? 약 1년.
석 달과 1년. 숫자로 보면 9개월 차이지만, 환자 입장에서 보면 다른 이야기다.
환자 수가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까까지 "시장성 없다"고 생각했던 건이, 머릿속에서 다른 모양으로 바뀌고 있었다.
복제약 검토가 아니라, 신약 도입 이야기로.
여기까지는 AI가 도와준 거다.
근데 진짜 판단은, 그다음부터였다.
왜 경쟁사들은 이걸 안 가져왔을까?.
수익성 때문일 수도 있다. 블록버스터는 아니니까. 대형 신약사들은 연 매출 50억 이하면 한국 시장에서 철수하는 경우가 많다. 아스트라제네카의 파슬로덱스주 철수도 비슷한 맥락이다.
아니면 급여 협상이 까다로울 거라고 봤을 수도 있다. 임상 결과는 좋지만, 기존 약가는 낮고 신약은 투자비 회수를 위해 높은 가격을 원한다. 그 간극을 메우는 과정은 늘 어렵다.
그래도 한 가지 가능성이 더 있었다.
그냥 아무도 안 봤을 수도 있다는 것.
이 질환은 메이저는 아니다. 하지만 이 병을 가진 환자들에겐 절실하다. 이런 틈새는 늘 있다. 다들 숫자만 보다가 지나치는.
급여 등재는 가능할까. 기존 약 대비 우위를 어떻게 입증하지. 우리나라 환자들을 대상으로한 가교 임상이 필요한가? 우리 영업팀이 커버할 수 있는 채널인가.
이 질문들은, 13년 동안 RA, BD, 마케팅, 전략기획을 거치면서 몸에 남은 것들이었다. 화면을 아무리 오래 쳐다봐도, AI가 대신 답해주지 않는 질문들이었다.
다시 Gemini로 돌아갔다.
"이 약물 한국 급여 등재 시 예상 약가는?"
"경쟁 약물 대비 임상적 우위 근거는?"
나온 답변들을 메모장에 붙였다. 숫자를 엑셀로 옮겼다. 환자 수, 약가, 공급가, 시장 점유율을 시뮬레이션 해서 비관, 중립, 낙관. 시나리오를 세 개 만들었다.
비관 / 중립 / 낙관.
PPT를 열었다.
약물 개요부터 시장 분석, 규제 전략, 재무 시뮬레이션, 추진 일정까지. 열 장. 자료 조사 및 보고 자료 작성까지 2시간 남짓 걸렸다.
상무에게 보냈다.
30분 뒤에 답장이 왔다.
"추진해보세요."
한 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Gemini 창을 다시 봤다.
그때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와, AI 덕분이다'라는 느낌보다는, '아, 내가 판단하는 속도가 빨라졌구나' 쪽에 더 가까웠다.
요즘 "AI로 신약 개발 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이건 확실하다.
예전엔 그 직관을 검증하는 데 며칠이 걸렸다. 그 사이에 직감은 식었고, 왜 그게 좋아 보였는지도 흐려졌다.
지금은 두 시간이면 된다.
기획자의 직관이 식기 전에, 바로 사업 제안서가 될 수 있다.
판단의 도구 #1 AI는 생각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다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자리까지 데려다주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을 뿐이다.
<판단하는 사람의 도구들> 이라는 주제로 연재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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