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시험 결과가 말해주지 않는 것들
“데이터는 정말 좋습니다.”
자문회의에서 발표중인 슬라이드에는 OS(Overall Survival, 전체생존율) 그래프와 PFS(Progression Free Survival, 무진행생존기간), HR(Hazard Ratio, 위험비)이 나란히 떠 있었다.
숫자만 보면, 반박할 이유가 없는 약이었다. 경쟁약 대비 유의미했고, Safety도 일반적인 항암제가 말하는 ‘관리 가능’ 범주였다. 현재 시장도 100억 이상. 제네릭 개발 후보로 보기엔 꽤 매력적인 카드였다.
나는 파이프라인 기획 담당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우리 회사는 제네릭을 개발할 때 숫자만 보지 않는다. 시장 자료를 기반으로 동일성분, 동일 효능효과에 비추어 경쟁 구도를 보고, 그리고 꼭 한 번은 실제 처방 의사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 약이 어떻게 쓰이는지, 현장에서 보는 Real World 데이터는 어떤지 허가받은 임상과 어떻게 다른지.
OS, PFS 모두 좋았다. 통계적으로 유의미했고, 거의 모범 답안에 가까운 결과였다.
그때 한 의사가 조용히 말했다.
“좋은 약인 건 맞는데요. 환자들이 좀 힘들어합니다.”
회의실 공기가 아주 조금 바뀌었다.
“부작용 관리가 생각보다 빡세요. 특히 고령 환자분들, 중간에 많이들 포기합니다.”
허가를 받기 위해 진행된 임상 자료에는 그런 말이 없었다. Safety profile도, 중도탈락률도 경쟁약 대비 나쁘지 않았다.
임상시험은 언제나 기준이 있다. 그리고 그 기준을 통과한 사람들만 남는다.
현실의 진료실에는, 그 기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
300명 혹은 500명 남짓의 결과 안에는, 그분들의 ‘이 약을 먹고 버티는 하루’가 들어 있지 않았다. 임상시험 결과는 “얼마나 더 사는지, 얼마나 질병의 고통 없이 살 수 있는지, 어떤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하지만 “어떻게 사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 약은 분명히 생존 기간을 늘렸다. 그리고 동시에, 어떤 환자들에겐 그 생존이 너무 버거운 시간일 수 있었다.
“그래서 저는요, 이 약을 다 쓰진 않습니다.”
의사는 그렇게 덧붙였다.
“환자분들 중에서도 연령이 조금 낮고, 컨디션 괜찮은 분들한테만요. 다들 데이터만 보고 생각하시는데, 실제로는 선별이 필요해요.”
그 말 한 줄 때문에, 나는 임상 데이터를 다시 보게 됐다.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 밖에 있는 사람들을 상상하면서.
기획자로서 나는 늘 데이터와 숫자를 먼저 본다. 시장 규모, 점유율, 환자 수, 경쟁 구도. 그리고 OS, PFS, Safety. 이건 생존을 위한 데이터다. 회사가 살아남고, 프로젝트가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언어다.
하지만 그날 자문회의에서 나는, 그 언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그 약이 나쁜 약이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약이었기 때문에 더 복잡했다.
“모든 환자에게 최선인 약”은 거의 없다. 대신, “이 환자에게 지금 최선인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 둘은 늘, 같은 방향을 가리키지 않는다.
회의실을 나오면서, 나는 메모장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임상시험 대상자들은 일부 환자의 모집단이고,
의사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한 명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데이터를 조금 다른 순서로 보기 시작했다. 먼저 결과를 보고, 그다음에 질문을 한다.
'이 약은, 어떤 사람에게 맞는가.
이 치료는, 어떤 삶의 리듬을 전제로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걸 감당할 수 있는 환자군을 적절하게 정의하고 있는가.'
데이터는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 숫자는, 판단의 시작일 뿐이다. 끝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데이터와, 삶을 위한 직관 사이에서 기획자는 늘 줄타기를 한다.
그리고 그 줄 위에서, 나는 점점 확신하게 됐다.
판단의 도구 #2.
숫자는 기준이고, 사람은 결정이다.
<판단하는 사람의 도구들> 이라는 주제로 연재중입니다.
1화.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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