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지대에서 전략을 설계한다는 것
"이건 안 됩니다."
RA(인허가) 일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문장이다. 그리고, 가장 많이 다시 생각하게 된 문장이기도 하다.
규제는 늘 벽처럼 보인다. 조문은 단단하고, 문장은 딱딱하다. 하지만 막상 그 앞에 서 보면, 벽은 흑백이 아니라 회색에 가깝다. 문제는 그 회색이, 사람마다 다르게 보인다는 점이다.
내가 처음 그걸 또렷하게 느낀 건, 비씨지 균주를 사용하는 방광암 치료제 케이스였다. 이 약은 공급 이슈가 있어서, 환자들에게는 사실상 필수에 가까운 약이었다. 이걸 못 쓰면 방광을 절제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환자의 QoL은 급격히 떨어진다. 회사 입장에서도, 전략적으로 꽤 중요한 제품이었다.
문제는 허가 과정의 첫 단추부터였다.
케미컬이냐, 바이오의약품이냐.
부서 간 핑퐁이 시작됐고, 서류는 세 달을 떠돌았다. 심사는 시작도 못 했다. 결국 윗선들의 협의 끝에 케미컬 부서에서 심사하기로 결정이 됐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품질, GMP 담당자가 두 번이나 바뀌었다.
수입 의약품이었고, 정식 GMP가 아닌 신속승인의 WHO GMP 제품이었다. 그래서 GMP 실사를 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설명했다. 결국 서류 심사로 전환됐다. 품질 자료와 GMP 자료를 정리해서 냈고, 그 부분은 통과했다.
규정상 약전 등재 제품이면 임상 면제가 가능한 구조였다. 그래서 그 트랙으로 갔다. 그런데 담당자는 말했다.
"약전 등재가 애매하고, 임상 면제로 가기엔 부담스럽습니다."
결국 마지막 문턱, 안전성 및 유효성 평가에서 "임상 자료 없음"으로 반려됐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이건 누가 틀렸고, 누가 맞았다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규정은 있었고, 해석은 갈렸고, 그 사이 어딘가에 우리가 서 있었다는 걸.
회색지대라는 건, 그렇게 생긴다.
비슷한 감각은, 또 다른 주사제 케이스에서도 반복됐다.
주성분 함량이 오리지널과 소수점 둘째, 셋째 자리에서 아주 미세하게 달랐다. 실질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라고 보기 어려웠고, 이전 허가 이력도 있었다. 규정에도 소수점 몇째 자리까지 똑같아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다. 우리는 큰 이슈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이런 사례가 없다"고 했고, 다른 쪽에서는 "괜찮을 수도 있다"고 했다. 식약처 본처와 지방청 사이에서 소관을 떠넘기는 동안, 아무도 결론을 내주지 않았다. 결국 위에서 전화를 하고 나서야, 그 건은 정리됐다. 그리고 허가는 났다.
그때 확실해졌다.
규정은 문장이지만, 현실에서는 지형이라는 걸. 그리고 전략이라는 건, 그 지형 위에 길을 그리는 일이라는 걸.
RA 초반의 나는, 규정을 외우는 사람이었다.
"규정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6년쯤 지나고 나서는, 말이 조금 바뀌었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 조건으로 쪼개면, 이 트랙으로 갈 수 있습니다."
"정면은 막혔는데, 각도를 바꾸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규제를 상대하는 일은, 결국 흑백 논쟁이 아니다.
"된다/안 된다"가 아니라, "어떤 조건이면 되는가"를 설계하는 일에 가깝다.
물론, 모든 회색지대가 돌파되는 건 아니다.
외국에서는 임상 없이 봉합사로 허가받은 의료기기 제품이 있었다. 국내에서는 신규 물질로 판단됐고, "임상 없이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미 허가된 성분 두 개를 조합한 제품이었고, 그 성분 소재도 널리 쓰이는 것들이었다. 그래도 안 된다는 답은 안 되는 답이었다. 그 케이스는 결국 임상으로 갔다.
그때 배웠다.
전략에는, 포기도 포함된다는 걸.
RA를 하면서 가장 많이 상대하는 건, 사실 규정보다 사람이다.
"회사에서 그렇게 가르쳤어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 업체 입장에서는 읍소할 수밖에 없는데, 태도는 무시와 갑질에 가까웠다.
어쩔 수 없다. 전화로는 "네, 네" 하고,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월급도 나보다 못 받을 텐데 스트레스가 많은가 보다. 불쌍하게 생각해야지.'
그게 내가 무너지지 않는 방법이었다. 다음엔 안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버텼다.
"지금 부정청탁하시는 건가요?"
공직자 부정청탁 금지법이 시행된 바로 다음 날, 심사는 다 끝났고 종결 처리만 남은 건이 있었다. 일정이 급해서 전화를 했다. 돌아온 말이 그거였다.
"부정청탁하시는 건가요?"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제까지는 '업무 조율'이던 게, 오늘은 '위험한 말'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그 건은 일정대로 처리됐다. 그렇다고 그 순간이 사라지진 않았다. 규정은 그대로인데, 공기가 바뀌는 순간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다.
반대로, 일이 잘 풀리던 담당자들도 있었다. 업체 입장을 들어주고, 말투가 부드럽고, 설명을 끝까지 듣는 사람들. 규정은 같아도, 대화의 결이 다르면 결과는 꽤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점점 이렇게 생각하게 됐다.
규제는 적이 아니라, 조건표다. 그리고 RA의 일은, 그 조건표 안에서 최적의 경로를 설계하는 일이다.
이 사고방식은, 일 밖에서도 그대로 남았다. 안 되는 걸 억지로 밀어붙이기보다, "그럼 어떤 조건이면 가능하지?"를 먼저 묻는 쪽으로. 정면이 막히면, 각도를 바꾸는 쪽으로.
RA 6년은 나에게, 세상을 회색으로 보는 법을 가르쳐줬다. 그리고 그 회색 안에서, 전략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줬다.
신입 때의 나는 말했다.
"규정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지금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설계하면, 이 범위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벽은 여전히 있다. 하지만 벽 앞에서 할 일은, 들이받는 게 아니라, 지도를 다시 그리는 거다.
판단의 도구 #3.
규제는 넘는 게 아니라, 설계하는 것이다.
<판단하는 사람의 도구들> 이라는 주제로 연재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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