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 없는 길을 걷는 법
"이건 Go 하죠."
그 말을 하면서도, 나는 이 프로젝트가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임상 3상은 원래 그런 단계다. 성공을 확신해서 들어가는 구간이 아니라, 실패를 전제로 구조를 설계하고 들어가는 구간이다.
국내만 해도 수십억, 해외까지 가면 백억 단위. 기간은 최소 몇 년. 그 시간을 쓰고도 실패할 수 있다.
그래서 임상 3상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의사결정의 문제에 더 가깝다. "될까?"보다 "틀리면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를 먼저 계산하는 단계.
2017년부터 검토하던 개량신약 주사제 프로젝트가 있었다.
회의실이 바뀌고, 담당자가 바뀌고, 전략 슬라이드의 결론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에도 프로젝트 이름만 남아 있었다. Prototype이 나온 건 2024년이었다. 7년.
그 사이 경쟁 약은 쏟아졌고, 파트너사들의 관심은 눈에 띄게 식었다. 시장은 이미 새로운 것들에 눈을 돌리고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2021년쯤, 나는 생각했다.
"이건 이제 아니다."
그 판단은 데이터 때문이라기보다, 타이밍과 회사의 위치 때문이었다.
제품이 나쁘다기보다는, 우리가 이걸 끝까지 끌고 갈 조직인가에 대한 의문에 가까웠다.
하지만 프로젝트는 계속 갔다.
"개량신약이니까 수출 쪽으로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기술 라이선싱으로는 쓸 수 있지 않을까?"
말은 그렇게 이어졌고, 결국 해외에서 예비 임상까지 진행했다.
실패했다.
그때 처음 실감했다.
매몰비용은 숫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시간도 들어 있고, 사람들의 기대도 들어 있고,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문장도 같이 붙어 있다는 걸.
비슷한 감각은 다른 프로젝트에서도 반복됐다.
안전성이 기존 약보다 좋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임상을 설계했던 케이스였다. 논리만 보면 충분히 설득력 있어 보였다.
하지만 현업에서는 다른 장면이 보였다. 약은 너무 오래됐고, 환자들은 이미 다른 치료제 옵션을 쓰고 있었다. 우리 약을 먼저 쓰게 되면 윤리적 이슈가 생길 수 있는 구조였다. 환자 모집은 느릴 게 뻔했고, 그 시간을 감당할 만큼의 경제성도 보이지 않았다.
"경제성이 없습니다."
회의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그리고 회사는 말했다.
"그래도 우리 회사 약을 살리는 게 목적입니다."
Go 결정이 났다.
예상대로, 환자 모집은 길어졌다. 다른 신약 임상으로 환자들이 몰렸고, 프로젝트는 결국 중단됐다.
이런 장면들을 몇 번 겪고 나서야, 나는 임상 3상이 어떤 단계인지 조금 더 정확히 보게 됐다.
임상 3상은 '정답을 맞히는 구간'이 아니라, '틀렸을 때를 관리하는 구간'이라는 걸.
Go/No-go 회의 자료를 만들 때마다, 같은 항목들을 채운다.
NPV, IRR, 회수 기간. 매출 가설, 개발 비용, 원가 구조. 시장 성장성, 경쟁 구도.
슬라이드 마지막 페이지에 결론이 나온다.
"Go" 또는 “No-go"
하지만 확신이 흔들릴 때가 있다.
그럴 때 문제는 거의 항상 제품이 아니라, "이걸 우리 회사가 끝까지 끌고 갈 수 있느냐" 쪽에 있다.
제품은 괜찮다. 시장도 있다. 숫자도 맞는다.
그런데 우리 회사에 그 기술이 있는지, 이 프로젝트를 몇 년 동안 끌고 갈 조직 체력이 있는지, 과거에 비슷한 시도로 이미 실패한 적은 없는지.
이 질문 앞에서는, 데이터가 답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Go/No-go를 볼 때, 결과보다 구조를 먼저 본다.
중간 점검 지점이 있는지, 어느 조건에서 멈출지 합의가 되어 있는지, 추가 투자의 기준은 무엇인지, 실패했을 때 어떻게 접을지.
임상 3상은 결과를 맞히는 게임이 아니라, 조직이 안전하게 끝까지 갈 수 있도록 가드레일을 설치하는 작업에 가깝다.
돌아보면, 내 커리어도 비슷했다.
R&D에서 RA로, RA에서 기획으로 옮길 때, 나는 확신이 있어서 움직인 적이 거의 없었다.
대신 늘 이 질문을 먼저 했다.
"이 선택이 틀렸을 때, 나는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때마다 완벽한 답을 알고 움직인 건 아니었다. 다만, 최소한 넘어질 수 있는 범위는 계산하고 들어갔다.
그래서 지금 와서 보면, 선택들은 하나의 직선이 아니라, 여러 번의 Go/No-go가 이어진 결과에 가깝다.
임상 3상도 같다.
데이터는 있다. 하지만 미래는 없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는 기준을 만들고, 구조를 짜고, 걸어 들어간다.
확신은 출발점이 아니라, 끝나고 나서야 붙는 설명에 가깝다.
판단의 도구 #4.
확신은 결과가 아니라, 실패를 관리하는 구조에서 만들어진다.
<판단하는 사람의 도구들>이라는 주제로 연재 중입니다.
3화.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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