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은 Off-label use를 중단한 날이었다
5화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어떤 결정이 확정 된 후 연재 하기 위하여
6화를 먼저 연재 하게 되었습니다.
신약 개발에서 가장 먼저 정하는 건 Indication, 적응증이다. Main Indication이 정해지지 않으면 임상은 시작되지 않는다. Off-label use는 가능하지만, 대개 효과보다 부작용이 먼저 온다.
나는 오랫동안 나를 Off-label로 써 왔다. 효과는 있었지만, 늘 부작용이 먼저 왔다.
입사 후 13년 동안 R&D, RA 를 거쳐 마케팅 기획 까지 다다랐다. 이동할 때마다 물었다. “여기가 내 Main Indication일까?” 대답은 유보였다. 대신 이런 말이 늘었다.
“이 건 한 번만 봐줘.”
“이 것도 가능하지?”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자주 불렸다. 그래서 더 빨리 닳았다. 그 시기의 나는 적응증이 과도하게 확장된 약과 같았다. 어디에든 투여 되었지만, 어디를 위한 약인지는 정의되지 않았다.
연구실의 일은 예측 가능했고 반복적이었다. 나는 루틴보다 설계와 판단에 더 반응하는 성향이었다.
어느날 회사가 물었고, 내가 답했다.
“RA 자리가 비었는데, 해볼 생각 있으세요?”
“회사에서 필요하다면 하겠습니다.”
첫 번째 Indication 변경. 연구자에서 규제 담당자로.
인허가 일은 구조적이었다. 규정을 해석하고, 회사의 입장을 설계하고, 논리를 정렬하는 일. 문제는 위치였다.
RA는 회사와 규제 사이에 선다. 양쪽의 언어를 번역하지만, 어느 쪽의 언어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
그 상태가 반복되면 피로보다 먼저 오는 게 있다. 내 판단이 어느 쪽에서도 보호받지 못한다는 감각.
전화벨 소리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오후 네 시가 되면 모니터가 흐릿해졌다. 눈이 아니라 판단력이 멈췄다.
이 적응증은 독성이 빨리 쌓였다.
치료 효과 보다 독성이 먼저 누적되는 구조였다.
두 번째 Indication 변경.
이 용도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지금은 마케팅 기획이라는 이름으로 BD, 개발, 사업, 전략을 함께 본다.
데이터를 보고 판단하고 구조화한다. 이 자리가 달랐던 이유는 하나였다.
R&D에서는 프로토콜 안에서 반복했고, RA에서는 양쪽 논리 사이에서 소모됐다.
여기서는 최종 판단의 설계가 내 몫이다. 통역이 아니라 편집. 소모가 아니라 통합.
10여년의 경험이 처음으로 자산으로 작동했다. 가장 근접한 적응증이라는 감각이 왔다.
그런데, 2025년 5월 수술을 했다.
회복은 더뎠고, 호르몬 치료까지 겹치며 몸은 쉽게 복귀하지 못했다. 택시로 출근했고, 유급휴가를 다 소진했고, 무급휴가 까지 썼다.
그때도 나는 생각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괜찮아질 거야.”
지금 보면, 그건 사용 조건을 무시한 채 계속 투여하던 판단이었다. 효과는 있었지만, 부작용이 먼저 오는 방식이었다.
12월 말, 결론을 냈다.이건 아니다. 2026년 첫 출근날, 나는 3개월 휴직을 말했다.
“두 달만 쉬면 안 돼요?”
“안 됩니다.”
그때 분명해졌다. 문제는 일이 아니라, 사용 조건의 통제권이 내게 없었다는 것이었다.
Main Indication을 찾는 문제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건, 잘못된 사용을 중단하는 판단이었다.
나는 일을 쉬는 게 아니라, 나에 대한 Off-label use를 중단했다.
휴직 중에 “판단의 도구들”을 쓰고 연재하기 시작했다. 몸은 멈췄고, 판단은 선명해졌다.
13년의 선택들이 구조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해했다.
Main Indication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약도 모든 질환에 쓰이지 않는다.
Dual Indication은 존재하지만, 그 역시 엄격한 전제조건 위에서만 성립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묻기보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쓰이면 실패하는가를 먼저 정의해야 했다.
R&D에서도, RA에서도, 지금도 완벽한 적응증을 찾지는 못했다. 대신 Contraindication(금기 사항)은 하나씩 명확해졌다.
루틴 반복은 장기 사용 불가.
감정노동 중심 환경은 독성 축적.
판단 권한이 없는 위치는 지속 불가.
Main Indication은 선언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Contraindication을 확정해 갈 때,
그 전제 위에서만 허용되는 사용처가 적응증이 된다.
판단의 도구 #6.
적응증은 찾는 게 아니라, 금기를 한정하고 지워가는 것이다.
적응증을 지우는 일은 경계를 정하는 일이다.
하지만 경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안에 남길 여유가 필요하다.
7화. 마진의 미학
<판단하는 사람의 도구들>이라는 주제로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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