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마진의 미학

파산을 막는 건 수익이 아니라 여유다

by 서로빛

협상이 깨진 건, 고작 5% 때문이었다.


판권 딜이었다. 우리 쪽 희망 조건과 상대 조건의 차이는 솔직히 크지 않았다. 숫자만 보면 "이 정도면 조정하면 되지 않나?" 싶은 정도였다.


실제로 양쪽 다 몇 번씩 양보안을 꺼냈다. 회의실 공기도 나쁘지 않았고, 논리도 충분했다. 그런데도 딜은 깨졌다.


이유는 단순했다. 양쪽 모두, 이익 구조상 더는 양보할 수 없는 선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선이 정확히, 5%만큼 어긋나 있었을 뿐이다.


회의실을 나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진이 너무 좁으면, 합리적인 협상도 깨진다.

논리가 아니라, 구조 때문에.


협상에서 말하는 마진은 "더 깎아줄 수 있는 여유"이기도 하고, "여기까지는 버틸 수 있는 완충 구간"이기도 하다. 그게 없으면, 딜은 의외로 쉽게 무너진다. 서로 비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구조상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어서다.




반대로, 영업이익이 안 나와도 해야 했던 딜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시작부터 체력이 빠져나가는 구조였다. 고정비를 서로 나눠야 했고, 매출 이슈가 걸려 있었다. 우리 레드라인은 적자였지만, 최소한 변동비의 120%는 맞춰야 했다. 상대도 썩 내키지는 않아 했다. 그래도 해야 했다.


그 딜은 체결됐다. 대신, 시작과 동시에 소모가 예약된 구조였다.


그때 알았다.

마진이 없는 딜은, 출발선에 서는 순간부터 체력을 갉아먹는다는 걸.




일을 하다 보면, 결국 숫자보다 구조를 보게 된다.

이익률이 몇 퍼센트냐보다, 실패를 흡수할 구간이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임상시험 설계도 비슷하다.

탈락률, 통계적 유의성, 샘플 사이즈. 전부 "얼마나 여유를 두느냐, 아니면 얼마나 타이트하게 가느냐"의 문제다. 탈락률을 너무 낙관적으로 잡으면, 몇 명만 빠져도 시험 전체가 흔들린다. 실제로 그런 적이 있었다.


계획 단계에서는 논문과 가이드라인 근거를 다 맞췄는데, 식약처의 내부 기준이 들어오면서 설계가 통째로 흔들린 적도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마진은 약함이 아니라, 실패를 흡수하기 위한 설계라는 걸.




협상에서도, 임상에서도, 우리는 늘 Best / Mid / Worst 시나리오를 놓고 레드라인을 정한다.

마진은 이익을 늘리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파산을 막기 위한 구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관계에서는 그걸 전혀 하지 못했었다.




"이번만 참으면 달라지겠지."

여러 번 그런 생각을 했다. 불쌍했고, "이것만 고치면"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래서 계속 도와줬다.


협상이었으면, 진작에 테이블을 접었을 구조였다.


관계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나는 마진을 전부 써버리는 쪽을 택했다.


더 나쁜 경우도 있었다.

상대의 감정 기복에 맞춰 내 일상이 흔들렸고, 불안이 심해졌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됐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건 버티는 관계가 아니라, 나를 갉아먹는 구조였다는 걸.


한참 뒤에야 거리를 뒀고, 결국 관계를 종결했다. 그 과정에서 내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때서야 이해했다.




일에서는 늘 리스크를 분산하라고 말하면서, 삶에서는 올인했다. BD와 전략에서는 포트폴리오를 짜면서, 관계에서는 "이번엔 다를 거야"라는 말로 계속 베팅했다. 변동성 한 번에 계좌가 청산되는 구조를, 나는 너무 오래 유지했었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일에서는 여전히 Best / Mid / Worst를 놓고 설계한다. 그게 습관이 됐다.


관계에서는, 내 몸이 먼저 반응하는 선을 기준으로 본다. 이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걸, 이제는 꽤 빨리 알아챈다. 누군가 그 선을 넘으려 하면, 거절하는 연습을 한다. 무엇보다, 누구든 무언가든 쉽게 믿지 않게 됐다.

생활에서도 마진을 남긴다.


일에선, 컨디션을 기준으로 우선순위를 정하고, 근무 시간을 조절한다. 휴식은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시간으로 채운다. 가끔은 미디엄 템포의 재즈나 하우스를 틀어놓고 책을 보기도 한다.


관계에서는, 나를 위한 시간을 먼저 남겨둔다. 내 기분을 점검하고, 한계를 확인한다.

마진을 남기지 않았던 시기에, 나는 수시로 번아웃을 겪었고 큰 트라우마를 얻었다.

마진을 남기기 시작한 지금, 나는 조금은 여유가 있는 상태로 나를 지키며 살고 있다.




협상에서든, 임상이든, 관계든, 인생이든.

마진은 이익을 극대화하는 기술이 아니라, 무너지는 걸 막는 설계다.



판단의 도구 #7.
마진은 수익을 늘리는 장치가 아니라, 파산을 막는 구조다.





<판단하는 사람의 도구들>이라는 주제로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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