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레시피와 프로토콜 사이

판단 피로의 시대에 필요한 건 의식이다

by 서로빛

판단 과부하가 걸린 날, 나는 알리오 올리오를 만든다. 마늘을 썰고, 올리브유를 두르고, 면수를 맞춘다. 가장 쉬운 레시피를 고르는 순간까지는 판단이 필요하다. 그 이후로는 거의 필요 없다. 구조가 단순하고, 결과가 어느 정도 보장된다.


그날 회사에서 수십 번의 Go/No-go를 결정했다면, 이 정도의 단순함이 필요하다. 일에서는 그 반대만 요구받으니까.




임상은 프로토콜로 움직인다. 모든 변수는 통제되고, 편차는 최소화된다. 재현 가능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데이터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프로토콜은 안전하다. 대신, 숨 쉴 틈이 없다.


R&D에서는 조건 안에서 반복했고, RA에서는 규정과 규정 사이의 여백을 계산했다. 마케팅에서는 승인할지, 보류할지, 밀지, 접을지를 정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 전략적 사고는 고급 연료를 쓴다. 피로는 천천히 오지만, 한 번 오면 오래 간다.




나는 파스타와 라자냐를 자주 만든다. 레시피는 참고하되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계량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날의 재료 상태와 기분에 맞게 조절한다. 내 취향을 덧대면 더 나은 결과가 나온다.


프로토콜과 다르다. SOP는 정해진 대로 해야 한다. 내가 수행하지만, 내 판단은 아니다. 레시피는 방향만 제시한다. 결과는 구조 안에서, 내 감각으로 조정된다.


차이는 정밀도가 아니라, 판단의 소유권이다.


요리할 때 가장 통제감을 느끼는 순간은 중간에 맛을 볼 때다.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내가 조절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순간. 그리고 마지막 한 입. 결과가 손에 들어오는 감각.


프로토콜은 통제를 위해 나를 제한한다. 레시피는 통제를 위해 나를 활용한다.




판단에도 층위가 있다.


프로토콜 — 타인의 규칙 안에서 판단한다.

레시피 — 프레임은 있지만 내가 조절한다.

리추얼 — 판단 자체가 필요 없다.


산책, 샤워처럼 결정을 요구하지 않는 것들. 반면 음악이나 와인, DJ는 감각을 써야 한다. 공명 여부를 판단해야 하니까. 같은 취미라도 층위가 다르다.


판단 과부하가 걸린 날, 나는 이 스펙트럼을 아래로 내린다. 프로토콜에서 레시피로. 레시피에서 리추얼로.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점까지. 맥주를 마시거나, 그냥 쉰다. 그 또한 구조다.




휴직 이후, 요리를 거의 하지 못했다. 판단 용량이 바닥나면, 레시피조차 프로토콜처럼 무거워진다.

한동안 리추얼 아래에 머물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그러다 가장 단순한 것부터 다시 시작했다. 샐러드, 봄동비빔밥. 레시피라기보다 리추얼에 가까운 요리. 구조가 단순하고 실패 가능성이 낮은 것들. 이제는 냉이와 달래, 두릅을 생각한다. 제철 재료를 고르는 일은, 지금의 내가 다룰 수 있는 범위를 선택하는 일이다.


회복은 복잡함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조절할 수 있다는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다.



판단 피로의 시대에 우리는 더 정교한 도구를 찾는다. 더 빠른 AI, 더 많은 데이터, 더 정확한 모델. 그러나 연료가 고갈된 상태에서는 정교함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때 필요한 건 도구가 아니라 의식이다.


의도적으로 설계된 반복 행위. 결과가 완벽하지 않아도, 과정이 예측 가능한 루틴.


프로토콜은 실패를 줄이기 위해 존재한다.

레시피는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존재한다.

리추얼은 다시 시작하기 위해 존재한다.



판단의 도구 #8. 판단 피로 상태에서 필요한 건 더 나은 계산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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