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글쓰기의 변

by 스텔라정

2020년의 봄,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무엇에 관한 것이든,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책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의 흥분이 가시기도 전에 온갖 머릿속 말들을 급히 노트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숨을 쉬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처럼, 거침없는 호흡의 말들을 받아 적었고 그렇게 나의 두서없는 글쓰기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의 결과물은 정리되지 않은 조각들에 불과했고 머릿속 혼란의 짐이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이 조각들을 어떻게 이어 붙일지, 이어 붙인다면 어디에서부터 나는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아니 그보다 먼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나는 이 시작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지,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 지금까지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비범한 글쓰기를 꿈꾸며 무엇인가 되고자 했던 각오가 무색하게, 다시 너무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늘 그랬듯 약간의 불안감을 안고 그렇게 지냈던 것 같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노출시킨다는 것은
절대 자신의 에고를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대로 연출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이 그저 하나의 인간 존재임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밑줄 그었던 수많은 문장들 중 하나다.


정말 그랬다. 나는 내 존재를 드러내 보여야 하는 일이 절실히 필요했다. 10년 넘게 손 때 하나 없이 깨끗이 책장에 꽂혀 있었던 이 책을 집어 읽기 전부터 사실 나는 나 자신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 내려가야만 하는, 동시에 써 내려가야만 풀 수 있는 숙제를 안고 있었다.


이곳은 호주 시드니. 7년 전, 소개로 만난 남편과 결혼하면서 남편이 살고 있는 시드니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4년 전 첫 아이를 안았고 2년 채 되지 않아 연이어 둘째 아이를 품에 안았다. 비교적 평탄하고 잔잔히 흘러온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둘째 아이가 돌 즈음되었을 무렵,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상황과 관계 문제로 인해, 그리고 연년생 두 아이들을 독박으로 키우면서 늘어난 심적, 육체적 부담이 겹쳐져 주기적인 우울증과 불안증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이상은 도움 없이는 정말 큰일이 날 것 같다는 긴 두려움 끝에 결국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고, 2020년 봄, 상담 선생님의 숙제로 반강제적인 첫 번째 글쓰기를 시작했다.


결과만을 말하자면, 이 글쓰기라는 수단은 모든 문제와 정답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빼곡히 채워진 노트 한 권은 나의 본체 그 자체였고, 한 동안 그 안에서 씨름을 하며 나는 다시 생기와 힘을 얻었다. 한 권을 거의 다 채웠을 무렵, 선생님에게서 이제 더 이상 오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을 하는 선생님의 옅은 미소에서 이전에는 본 적 없는 느긋함을 읽었는데 그 느긋함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정확히 내 안에서도 느껴져 나 역시 동일한 미소를 지으며 나올 수 있었다.


뼛속까지 새겨있던 나의 이야기를 뱉어내며 이 상담 시간을 통해 얻은 것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내가 억지로 그려낸 예쁜 틀 안에 가려져 있던 콤플렉스가 결국 모든 혼란의 주도자였고 나는 그것을 끄집어내어야 했다. 직면해야 했다.


어쩌면 끄집어내기도 전에 이미 그 좁은 틈을 비집고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던, 외면했던 그 조각들을 글로 꾹꾹 옮겨 담는 작업이 바로 나의 글쓰기의 시작이었고, 글로 옮겨진 두서없는 수많은 이야기 조각들을 눈으로 확인하며 나는 무엇인가 다시 내 안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확신에 활기를 되찾았다.


그렇게 봄이 지나고, 나의 글쓰기는 멈추었다.


회복이 되었다는 안도감에서인지, 육아와 살림과 기타 일들을 예전보다는 넉넉하게 감당하고 있다는 자만함으로 인한 게으름 때문인지, 펜을 한동안 들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도 없이 문득문득 글감들이 생각날 때마다 글을 쓰고 싶다는 간지러움이 다시금 꿈틀거렸다가도, 갈급함 없는 하루의 끝은 드라마 속 가벼운 대사들과 속 빈 웃음으로 채워지곤 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수많은 기록의 파편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반드시 해야 하지만 미루고 있는 숙제를 생각하듯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리고 비로소 지금, 다시 자리에 앉아 그 조각들을 더듬으며 나의 두 번째 글쓰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지난 첫 글쓰기의 훈련으로 인해 나는 내가 가진 수많은 이야기들을 다시 찾았고 그것은 어쩌면 나의 삶도 이 혼란에서 벗어나 다시 빛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 걸음 나아가 나의 모든 이야기 조각들을 잘 다듬어 이 혼란의 실뭉치를 풀어 나가는 동시에, 골드버그의 말과 같이 '나의 인생을 노출시켜 그저 하나의 인간 존재임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한번 제대로 해보려고 한다.


누군가와 소통하는 일은 나에게 가장 어렵고 때때로 두렵기도 한 일이지만, 글쓰기라는 수단을 통해서라면 조금 더 정직하고 덤덤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벌거벗고 뼛속까지 내려쓰기. 진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무슨 일을 시작하려고 하면 나는 언제나 서론이 길다. 부디 이것이 서론으로 끝나지 않고 큰 본론의 시작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