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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thewind Feb 23. 2020

친구와 온천 외박

"저희 호텔 온천수는 식수로 사용가능 합니다."

결혼한 친구들이 나에게 "넌 집에 가면 혼자잖아."라는 말을 할 때가 있는데 누가 언제 말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 전혀 다른 뜻으로 들리는 말이다.

친구와 수안보파크호텔에 다녀왔다. 요즘 만날 때마다 답답하다고 하소연하더니 서울에서 두 시간 이내 거리에 갈만한 온천을 찾으며 당장 휴가를 낼 수 있다고 했다. 나도 일정이 맞아서 그대로 평일 1박 2일 외박을 다녀왔다.

친구 퇴근시간에 맞춰 집으로 픽업을 갔다. 넉넉한 쇼퍼백과 작은 쇼핑백을 들고 나타난 친구는 차에 타자마자 투명 텀블러에 담아온 포트와인을 꺼냈다. "맛 좀 볼래?" 하, 너를 태우고 운전하는 것만 아니었어도 한 모금 했을지도. 집에 고구마가 있길래 몇 개 구워갔는데 친구가 퇴근 후 출출했는지 군고구마를 연신 두 개나 해치웠다. 그리고 나에게 "감자칩 먹을래?"하고 물어왔다. 나중에 이야기하다가 알았는데 알감자구이, 고구마 같은 걸 좋아한다고 한다.

친구가 퇴근을 일찍한 덕분에 4시에 출발해서 수안보파크호텔로 쉬지 않고 달려 딱 6시에 도착했다. 수안보 지역에 들어서면서부터 90년대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 즈음 절정을 찍고 이제 낡아가는 것밖에 남지 않은 건물들을 지나 근처에서 가장 높아 보이는 언덕 위의 호텔에 도착. 건물이 오래되고, 면적에 비해 지금 활용중인 공간이 10%도 되지 않아 보였을 정도로 한적하고, 직원도 프론트에 한 명 식당에 한 명 외에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신기하게도 으스스하다는 느낌보다 평화롭다는 느낌이었다. 방 키를 받아 들고 엘리베이터를 잘못 타서 불이 꺼진 복도에서 룸넘버를 찾아 헤맬 때도, 추리소설의 배경으로 완벽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면서도 알 수 없는 평온함이 느껴졌다.

근처에 있는 한화리조트와 수안보파크호텔 중 어느쪽으로 할지 고민했는데 방에 도착했을 때 후자를 선택한 것에 만족했다. 최근 리모델링을 한 게 분명한 욕실은 깨끗했고, 역시 교체한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침구는 가볍고 뽀송했다. 방문을 열자마자 온돌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훅 느껴졌던 것도 싫지 않았다. 그리고 욕실에 적혀있던 스웨그 넘치는 한 마디. "저희 호텔 온천수는 식수로 사용가능 합니다."

방은 신관 3층이었는데 발코니가 방만큼이나 넓게 뻗어있었고 그 앞으로 탁 트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산으로 둘러싸인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좋은 위치였다.

도착한 날 저녁에 온천을 할지, 다음날 오전에 할지 고민하다가 일단 친구가 챙겨온 레드와인을 따고, 내가 가져온 루미큐브를 꺼냈다. 첫 판은 연습 게임. 인터넷에서 게임 방법을 찾아 보여주니 바로 규칙을 익힌 친구는 연습게임과 본 게임 다 나를 이겼다. 난 그저 재미있었다. 승부욕이 없어서 행복해요. 알고보니 친구는 보기와 다르게 게임 승부욕이 제법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 둘 다 행복했네 그럼.

이 친구와 온 첫 여행이고, 이 친구를 태우고 운전을 한 것도 처음이고, 무사히 도착했으니 긴장도 좀 풀렸고, 와인도 잘 넘어갔다. 차에서 뜯은 감자칩이 남아서 안주 삼아 와인을 마셨다. 곧 저녁을 먹을테니 가볍게 먹기에 적당했다.

보통 이쪽 온천여행을 오면 시내에서 꿩요리 코스를 먹고 오는 모양인데 친구가 먹는 것에 별 관심이 없는 편이기도 하고 일정도 짧은데 분주하게 오가고 싶지 않아서 저녁은 호텔에서 먹기로 했다. 식당이 9시 전에 마감을 한다고 했기 때문에 일곱시 반 쯤 내려가서 김치찌개와 돈까스를 시켰다. 식당에 우리 뿐이었다. 버드와이저도 시켰는데 직원이 카스밖에 없다더니, 그것도 없어서 편의점에서 수입맥주 두 캔을 가져다 주며 오천원만 받겠다고 했다.

먹는 것에 별 관심 없다던 친구는 김치찌개를 한 입 먹더니 "괜찮은데?"하고 빙긋 웃었고, 감자볶음, 깻잎 무침, 참나물, 표고버섯 무침, 그리고 오징어채처럼 생긴 어린 삼을 양념에 무쳐낸 반찬을 하나하나 먹어보며 감탄했다. 내가 메뉴판에 계란후라이가 나온다고 써 있는 걸 보고 찌개를 시키자고 했는데 안 나와서 친구가 왜 안나오냐고 문의했고, 아침에만 나오는 거라고 대답하고 간 직원은 곧 반숙 계란후라이를 하나 해왔다. 친구가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작게 "그거 때문에 시켰는데..."라고 말했던 것도 같다. 친구의 양보로 계란후라이는 고스란히 내 차지가 되었다. 나는 또 행복. 김치찌개 먹을 때 반숙 노른자랑 같이 먹으면 행복한 맛이잖아요.

돈까스는 그러고도 한참 후에야 나왔다. 통째로 튀겨낸 돈가스에 진한 소스가 반 정도만 겨우 덮여 나와서 한국식인지 일본식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익숙한 맛이었다. 반주인 수입 맥주 두 캔은 샹파뉴엘 블랑쉐와 칼스버그였는데 그 중 샹파뉴엘 블랑쉐만 따서 둘이 나눠마셨다. 김치찌개 한 입, 돈까스 한 입. 그리고 맥주 한 모금. 샹파뉴엘 블랑쉐는 블랑과 캔은 비슷하게 생겼는데 맛은 더 청량하고 부드러웠다.

식사 2인분에 맥주 한 캔을 나눠 마시고 배가 빵빵해져서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뒹굴며 아까 마시다 만 와인을 좀 더 마시는 척 하다가, 자기 전에 욕조 목욕이라도 하기로 했다.

욕조에 물을 받고, 내 유튜브로 옐로우 믹스테잎의 음악을 듣다가, 친구가 먼저 들어갔다. 십분 쯤 지났을까? 욕조에서 나온 친구는 수건만 두르고 베란다로 나갔다. 그리고 "하나도 안 추워! 시원해!"라고 외쳤다. 쟤가 왜 저러나. 2-3분 쯤 베란다에 있던 친구는 그대로 침대에 와서 잠깐 누웠다가 다시 욕조로 들어갔다.

친구가 씻고 나온 후 다시 물을 받고 내가 들어갔는데 오분만에 아까 친구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고 가슴이 답답해지길래 나도 물기만 대충 닦고 베란다로 나가봤다. 정말 하나도 안 춥고 시원하고 기분 좋은 쾌적함이 몸을 감싸는 것이 아닌가. 너무 신기해서 실외 온도를 확인했는데 0도 왔다갔다 하는 상태였다. 와우. 잠시 후 다시 욕조에 들어갔더니 또 따뜻하고 포근하고. 와아.

둘 다 몸을 담그고 나와서 뜨끈해진 상태로 침대에 널부러져 와인을 마셨다. 각자 핸드폰을 보며 나는 친구가 챙겨온 스모크치즈를, 친구는 내 차에서 꺼내 온 문어발을 씹었다. 친구가 남편도 본인도 일을 하는데 매일 저녁 식사를 본인이 준비하는 것에 대해 언급했던 것 같다. 주말이면 남편이 뭐라도 하겠지 기대하곤 하는데 그 속을 아는 것처럼 스파게티가 먹고싶다는 둥 외식타령을 한다고 한다.

나는 친구가 호소하던 '떠나고 싶은 상태'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친구는 '남이 해준 밥을 먹으면 낫는 병'에 걸린 것이다. 내가 이 진단을 친구 남편에게 전하는 날이 올까? 우리 셋은 모두 친구고, 친구 부부는 둘 다 의사다.

양치질하기 싫다고 둘 다 열 번쯤 칭얼대다 서로 체면을 차리느라 양치를 하고 나왔다. 친구가 나의 태국산 치약이 개운하다며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서 벽에 있던 온돌 전원은 껐고, 창문과 커튼은 닫았다. 난 창문을 열고 자고 싶었는데 친구는 그러면 추울까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침구가 보송하고 무겁지 않으면서 따뜻해서 피부에 스치는 느낌이 좋았다.

아침이 되고 보니 암막커튼인 줄 알았던 카키색 커튼은 빛을 80% 이상 그대로 통과시켰다. 우리 둘 다 8시 전에 깬 것 같은데 9시에야 일어났다. 여기 체크아웃이 12시라고 했으니 온천 사우나에 다녀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사람의 온기가 없는 건물을 지나 여전히 사람이 없는 사우나에 도착했다. 넓고, 햇빛이 잘 들고, 쾌적했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 사람이 한 명밖에 없어서 습기에 차 있는 느낌은 없었다. 우리는 샤워를 하고 바로 노천탕으로 향했다. 이 호텔을 선택한 이유였다. 숲 속의 노천탕.

노천탕엔 아무도 없었다. 산 한 가운데라 새소리가 들려왔고, 아주 작은 새 한마리는 탕 주변의 화분에 빨간 열매를 먹으러 왔다갔다 했다. 일본 료칸만큼은 아니어도 딱히 좋지 않은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느긋하게 앉은 듯 누운 자세로 "여기 유지비는 나오려나" "예전의 영광을 되돌리는 게 가능할까?" 따위의 걱정을 했다. 기대보다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작가가 한 달 정도 두문분출하기에 이보다 완벽한 곳도 없을 것이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고, 밥이 맛있고, 노천탕 훌륭하고, 방의 욕조도 쓸만하고, 룸도 깨끗하다. 건물 묘사만으로 추리 단편 하나는 뚝딱 나올 것 같은 분위기는 덤.

사우나를 마치고 방에서 나와 로비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도자기 판매장을 둘러보았다. 기념할만한 걸 하나 사가야지 했으나 딱히 꽂히는 게 없어서 참았는데, 또 간다면 우주선처럼 엉덩이가 펑퍼짐한 모양의 고블렛잔을 하나 사올 것 같다. 음, 또 가고 싶다.

아침은 숙소가 아니라 서울로 오는 길에 먹기로 했었다. 친구가 브런치가 먹고 싶다고 해서 찾아보았으나 적당한 곳이 없었는데, 어쩌다 올갱이해장국집을 발견하고 둘 다 이거다!를 외쳤다. 충주 시내 한 가운데에 있는 운정식당. 딱 12시에 도착해서 가게가 너무 바쁠까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우리 둘 뿐이었다. 왜그런가 했더니 6시부터 식사가 가능한 해장국집이었다. 우리 뒤로는 혼자 오신 아저씨 한 분, 혼자 오신 우리 또래 여성 한 분이 있었다. 여기도 혼밥이 대세구나.

TV가 브라운관이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신기해서 핸드폰으로 찍는데 브라운관 특유의 검은띠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현상이 보였다. 카메라 렌즈로만 잡히는 이 현상이 왠지 반가워서 몇 번이나 사진을 찍었다.

올갱이해장국은 아욱이 들어가서 부드럽게 훌훌 넘어갔다. 푸릇한 고추를 다진 양념과 빨간 고춧가루 양념장이 있었는데 나답지 않게 둘 다 양껏 풀었다가 먹을 수록 매워서 혼이 났다. 2인분부터 포장이 된다고 써있어서 포장해올까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친구는 나보다 먼저 식사를 마치고 다음 행선지를 검색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남자들이랑 밥을 먹어서 더 빨리 먹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출발 전부터 탄금대는 꼭 가보고 싶다고 친구가 말했기 때문에 점심을 먹고 탄금대부터 갔다. 소나무숲과 충주호를 끼고 그리 길지 않은 산책로가 이어졌다. 근처에 산다면 매일 한바퀴씩 돌기 딱 좋아보였다.

산책로 중간에 충주호 쪽으로 난 전망대에 서서 호수의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땅이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겁에 질려 전쟁이라도 난 줄 알고 뉴스사이트를 뒤졌다. 진짜다... 탱크가 내려오는 소리 이외의 다른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잠시 후 산책로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충주댐 발전 때문에 나는 소리라는 안내가 나왔고 친구가 나를 비웃었다. 하지만 내가 무서워할 때 손을 꼭 잡고 계단을 내려와줬으니까 괜찮아.

다음으로 중앙탑에 갈지 종댕이길에 갈지 고민하다가 중앙탑으로 향했다. 친구는 집에 가는 시간을 무조건 더 늦추고 싶어했고, 나는 퇴근길 러쉬아워 전에는 서울에 진입하고 싶었다. 시간은 이미 한 시 반. 중앙탑을 둘러보고,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촬영했다는 길을 걷고, 커피를 마시러 갔다. '카페 루암리'. 동네 이름이 '루암리'라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그 이름을 그대로 쓴 까페가 있었다. 삼층짜리 세련된 건물 옆에는 비닐하우스와 밭이 있었다. 비닐하우스와 밭이 있는 곳 옆에 삼층짜리 세련된 카페를 올렸다고 하는 게 더 맞겠지.

아메리카노 두 잔과 아이스크림 와플을 주문했다. 커피가 커다란 머그에 나와서 양이 꽤 많아 보였는데 맛도 진해서 흡족했다. 나이프와 포크로 와플을 썰어 먹으며 친구 남편이 주말에 빵을 구워서 아침으로 내놓고 자기도 주방일에 기여하고 있다는 생색을 내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시 반쯤 서울로 출발했다. 중간에 용인휴게소가 보여서 화장실 가고싶냐고 물었더니 집에 더 늦게 도착하고 싶으니 무조건 들리자는 답이 돌아왔다. 롯데리아가 있길래 양념감자를 하나 주문해서 나눠먹었다. 친구가 양념감자가 뭔지 모르길래 치즈파우더를 섞어서 뿌리는 임무를 맡겼다. 양념감자를 먹고 입맛이 돌아서 쥐포와 호도과자도 샀다. 입이 짧다고 한 친구는 나랑 있는 내내 그게 뭐든 맛있게, 빠르게 해치웠다. 애가 마른 편이라 입이 짧아서 그런 건가 했는데, 이번에 보니 잘 먹는데도 마른 편이라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인 것 같았다. 본인도 여행 내내 잘 먹는 자기 모습을 신기해 했다.

옐로우 믹스테잎의 '뛰뛰빵빵', '둠칫둠칫', '치명적인' 같은 테마 선곡리스트를 듣다가, 친구 핸드폰에 있는 인디밴드 '구와 숫자들' 음악도 듣다가, 클래식 FM을 틀기도 했다가 하면서 고속도로를 달렸다. 친구는 "들어본 칭찬 중에 기억에 남는 거 있어?", "요즘엔 밀롱가에서 누가 좋아?", "왜 너는 누군가에게 아주 잘해주려고 해?" 같은 들어본 적 없는 질문을 했다. 답을 하기는 했는데 하나같이 친구가 예상한 방향의 답이 아니었고, 그게 어떤 의미에서는 더 많은 답을 주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와버렸네."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을 때 친구는 조수석에 엉덩이가 붙은 것처럼 느릿느릿 팔 한짝 다리 한짝씩 차 밖으로 꺼냈다. 호도과자 봉투에 한 알이 남았길래 얼른 친구 가방에 넣어주었다. 시간은 어느덧 여섯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친구 집에서 우리집까지 40분쯤 걸렸다.

내 차로 다녀왔고, 친구가 숙소를 예약했고, 그 외에는 돌아가면서 결제했다. 예전에 처음으로 둘이 밥을 먹을 때 "넌 비용을 나중에 나눠서 정산하는 게 좋니, 돌아가면서 사는 게 좋니" 물은 적이 있고, 그 때 돌아가면서 사는 걸 선호한다는 답을 들었다. 이번에 공평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공평한 비용 분담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고 이번 방식에 둘 다 불만이 없어 보여서 더 묻지 않기로 했다. 난 총 비용을 반씩 부담하는 게 마음이 더 편하기는 하다.

나는 저녁에 수업을 듣고 밀롱가에 갔고, 친구는 집에 들러서 쉬다가 남편과 함께 밀롱가에 왔다. 어젯밤에 마시다 남은 와인병을 챙겨왔길래 나눠 마셨다. 1박 2일 여행을 다녀온 당일에 뒷풀이까지 한 셈이다. 와인병이 바닥을 보일 때 쯤 친구가 내 귀에 속삭였다. "오늘 저녁도 내가 했다. 그리고 화내지마... 설거지도 내가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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