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지 못하는 성격

나는 왜 일을 마무리하는 게 힘들까?

by Yeoul

학부생 시절, 후배 한 명이 그 친구의 친한 동기를 보며 했던 말이 가끔 생각납니다.


“000이 작업 끝낸 거 처음 봐”


실제로 디자이너들에게 ‘작업을 완료했다’는 건 개념상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나 기준이 없는 학생들이나 디자이너 지망생들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이지만 디자인은 미적 영역이 관여되는 작업이기 때문에 손을 댈수록, 수정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본인의 역량 안에서 퀄리티는 좋아집니다. 마치 글쓰기에서 퇴고의 과정을 겪어 단단해지는 것처럼 말이죠

저 역시 무언가를 끝내는 게 쉽지 않습니다. 지금도 끝내지 못한 채 작업 창만 떠 있는 것들이 한 두 개가 아니며 끄지 못한 윈도우 탭들로 바느질을 하는 사람입니다. 책장에는 반 정도 읽고 방치된 책들도 수두룩하고 며칠 전까지는 블로그에 완성하지 못하고 임시 저장한 글만 5개가 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디자인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생긴 버릇인 것 같습니다. 과업이 생각나면 빨리 해야 한다라는 조급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해도 해도 아웃풋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미련하게 붙잡고 있게 되는 것이었죠.


그럼 이런 사람들에게 회사 생활은 늘 곤욕일까요?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회사에서는 pc에 윈도우 탭들로 바느질을 하지도, 마감 기한을 놓치지도, 작업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개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후배 또한 남들이 다 알만한 유니콘 기업에 들어가서 매거진, 인터뷰 등으로 종종 소식을 전해 들을 정도이니 그만큼 회사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겠죠.


그럼 이게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을 잘 끝내지 못하는 사람들은(저를 포함) 어쩌면 욕심이 많고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다르게 생각하면 겁이 많고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일 수도 있고요. 작업을 하는 도중 자꾸 다른 아이디어들이 튀어나오거나 다른 할 일들이 생각나고, 작업을 끝내고 싶지만 스스로가 계획하거나 의도했던 것의 반도 못했다고 생각해서 '완성'을 미루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도 회사에서의 과업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회사 업무와 개인의 일 사이에는 ‘마감’과 ‘공동체’가 있습니다.

같은 포트폴리오 정리라도 회사 내부에서 진행하는 포트폴리오 정리는 이틀이면 충분한데, 개인 포트폴리오는 한 달 이상이 걸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회사의 포트폴리오를 정리하기 위해선 팀장님이나 사수의 지시가 선제적으로 발생합니다. 물론 사수가 없는 집단에서는 KPI나 공동의 목적 아래 하나의 태스크로 발생하겠죠. 그리고 그 업무를 시작함과 동시에 다음의 과업이 저를 기다리고 그걸 하기 위해 첫 번째 과업의 마감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회사에는 이런 보이지 않는 작은 프로세스들과 인과관계가 있습니다. 그렇게 정해진 마감은 일을 잘 끝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시스템'으로 작동합니다.


또 다른 이유는 개인의 일은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각에서는 회사 업무와 달리 내 것이 너무 소중하기에 잘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생기는 부담감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약간 다른 생각입니다. 제 것이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마음보다는, 공동체의 부재로 인해 결여된 책임감과 온전히 ‘나’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는 언뜻 보면 상반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만, 여러 이해관계들 속에서 생긴 ‘책임의식’의 자리에 홀로 평가대에 오른 것 같은 ‘부담감’이 비집고 들어서는 것이지요. 그러니 공동체가 없어진 개인으로서 완료를 더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종종 효율적이다, 시간을 알차게 쓴다는 이야기를 나름대로 들었던 제가 요즘 혼자만의 시간을 운용하다 보니 한때 잘 끝내지 못했던 성향이 다시금 생각납니다. 지금도 프레셔가 없으면 상당 부분 끝을 미루지만, 그래도 개인 프로젝트를 잘 이끌어나갈 나름의 방법들이 쌓여 공유해 볼까 합니다.




첫 번째, 외부의 마감 기한 가져오기


‘글은 원래 어른들도 못 끝내는 것이다. 끝을 못 내는 것은 마감이라는 게 없기 때문이야’

장항준 감독이 예능에 나와 나는 왜 글을 끝내지 못할까라고 묻는 딸의 질문에 한 답입니다. 이 장면을 보고 너무 공감해서 무릎을 쳤는데, 그 뒤의 말이 더 공감이 되었습니다.

‘돈을 받고서 하는 일이기에 끝을 낼 수 있는 것인데, 혼자 글을 쓴다고 아무도 너한테 돈을 주지 않지 않느냐’

회사에 속해 일을 하던 외주 작업을 하던 돈을 받고 하는 일이다 보니 마감 기한을 지키는 것은 클라이언트와의 기본적인 약속이 됩니다. 우리가 재화를 사거나 유료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디자인을 돈으로 사는 개념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기한을 꼭 맞춰야할 의무가 생깁니다.

이 의무감을 개인 작업에도 적용시키자는 것입니다. 개인 작업에는 목표날 검사해 주는 타인이 존재하지도, 돈을 주는 누군가도 없기에 우리는 외부에서 마감일을 끌고 와야합니다. 장항준 감독의 솔루션처럼 공모전 제출도 좋고 당장 마땅한 공모전이 없다 하면 주변에라도 알리세요. 다음 주까지 어떤 걸 하는 게 목표다라고 주변에 알리면 그 사람이 잠재적인 숙제 검사자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타임 어택하기


그렇지만 정말 ‘마감일’만 설정하는 것은 시간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방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계속해서 미루다가 마감일에 연연해 당일 몇 시간 만에 일을 끝내버리면 퀄리티에 대한 자책감이 커서 이후 더 끝을 못 내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목표까지 잘 도달하기 위해서는 소량의 시간을 투자하는 횟수를 늘려야 합니다.

최근에 읽었던 책 [마일리지 아워]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쉽게 얘기하면 마감 기한까지 가는 과정들을 잘게 쪼개라는 것입니다. 3시간 걸릴 일을 3일 동안 하게 되는 이유는 그만큼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디자인은 시간을 들이면 들일수록 퀄리티는 올라가지만 이것은 온전히 순수 집중하는 시간의 총량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본인의 역량 어느 한계선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아무리 시간을 더 쏟아도 결과물은 비슷합니다) 무조건 시간을 많이 쓴다고 해서 온전히 그 시간을 몰두해서 쓰지 않기에 퀄리티가 같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타임어택을 즐겨야 합니다. 1-2시간 뒤에 외부 일정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 기획을 마무리하겠다, 운동 가기 30분 전 아티클 하나를 다 읽겠다 등 시간을 잘게 잘게 쪼개서 쓰면 빠른 압박에 집중력도 올라가고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됩니다.

초콜릿도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베어 먹는 게 더 맛있습니다. 원체 단 것을 많이 못 먹어서 개미 손톱만큼 베어 물고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면 커피의 씁쓸함과 다크 초콜릿의 달큼함이 아주 환상적인 비율로 블렌딩 됩니다. 이렇듯 풍족보다 결핍과 제한이 있을 때 더 소중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세 번째, 스스로의 상사가 되어라


디자인 작업을 할 때 마감 기한만큼 중요한 것은 퀄리티이지만 기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마감을 하기 더 어려워집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스스로가 상사로 빙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숙제 검사를 해주는 사람도 자신이 될 수 있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체 피드백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신입 시절, 이직을 위해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데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몇 날 며칠을 그렇게 머리를 싸매다가 저의 첫 팀장님이자 가장 존경하는 디자인 선배라면 이 포트폴리오를 보고 뭐라고 평가했을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어디를 수정해야 하는지 보이기 시작했고 길이 잡혀 하루 만에 정리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이 방법이 너무 추상적이라 반신반의할 수도 있겠지만 그 어떤 방법보다 강력했습니다. 정말 그 팀장님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팀장님이라면 이걸 고치라고 했을 듯’, ‘여기서 한번 태클 걸었을 듯’과 같은 상상을 해보면 그 잠깐은 사수의 눈을 훔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건 일을 빨리 끝낼 수 있게 도와줌과 동시에 디렉팅 능력을 훈련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결국은 시스템입니다. 회사에서 일을 하건 혼자 일을 하건 시스템이 있으면 언제든 끝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내 일도 회사의 업무처럼 시스템 안에서 굴러가게 만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회사에서도 아쉬운 퀄리티로 프로젝트가 마무리됐을 때 종종 이런 얘기들이 오갑니다.

일이 완료당했다, 프로젝트가 끝을 당해버렸다.

작업자는 욕심상 완료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감과 여러 상황적 요인으로 끝을 당해버리는 게 디자이너들에게는 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약간의 아쉬움이 있는 완성들을 해가면 언젠가는 그 갭이 줄어들고 자신감으로 변해 잘 끝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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