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차 방송국 디자이너가 본 일잘러들
방송국을 나온 지 한 달이 넘어가는 시점
방송국 디자이너가 경험한 좋은 클라이언트의 특징들을 정리해 봤다.
보통 우리 쪽에서 클라이언트에 회의를 요청하는 경우는 디자인 기획이나 작업물이 완료됐을 때다. 내부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낸 결과물을 선보이는 자리이며 적게는 2-3개, 많게는 6개 이상의 시안이 있다. 각각의 시안들에 대한 작업 의도를 피칭하면서 제작진의 니즈, 내지는 프로그램의 방향성과 얼라인이 되는 지를 검증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소위 말하는 ‘일잘러’ pd들은 그 회의 시간에 결정을 한다. 그 시간을 단순히 디자인 pt자리가 아닌,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기 위한 결정의 자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디자이너들, 더 나아가 그 회의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긍정적인 인상을 받게 되고 자연스럽게 프로젝트에 대한 주인 의식을 갖게 된다.
그럼 그게 가능한 이유는 무엇이냐, 본인이 생각하는 프로그램의 콘셉트가 명확하고 비주얼적으로 느껴졌으면 하는 소구 포인트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플러스로 전문가에 대한 신뢰이다. 쉽게 말해 자기가 잘하는 것에 대해 더 디깅 하고, 비주얼적인 부분은 디자이너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소화한다. 반대로 회의하는 동안 결정에 하등 쓸모없는 주관적 견해만 주고받다가 '좀 더 생각해 보고 피드백드릴게요'라는 답변을 내놓으며 회의실을 떠나는 클라이언트들은 회의가 끝난 후 모든 이들의 마음에 찜찜함만 남긴다. 비주얼적인 고민 이전에 프로그램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깊게 한 클라이언트라면 적어도 지금 시안들은 다 틀렸지만 a의 한 부분은 맞으니 이런 방향으로 디벨롭해달라라는 정도의 명확한 피드백을 준다.
아이러니하게도 각자의 일을 잘하자는 1번과 다소 상반되는 문장이다. 방송국 일을 할 때도, 서비스 제품 일을 할 때도 좋은 클라이언트들은 본인들의 기획이 잘 작동할 지에 대해 수시로 궁금해한다. 나는 이런 걸 기획하고 선보이고 싶은데, 이게 시장에 잘 먹힐까? 이게 잘되게 하려면 비주얼적으로는 어떤 걸 녹이는 게 좋을까? 같은 질문들을 한다. 결국 기계를 상대하는 일 외의 모든 제품들은 사람들의 니즈가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본인의 기획에 대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반응들을 살피며 덤으로 성공적인 실현을 위한 전문가의 견해도 묻는다. 이런 회의를 하고 나면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하고 있다는 긍정적 신호를 느끼고 결국 1번과 같은 결론이 난다.
디자이너는 디자인 기획부터 제작까지 클라이언트와 수시로 소통하게 된다. 완전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프로젝트도 있지만 대부분의 디자인은 제품과 콘텐츠의 기획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기에 기획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프로젝트의 소구 포인트가 무엇인지, 브랜드디자인 외의 다른 협업 부서들과의 진행 과정은 어떤 지(ex. 세트팀, 마케팅팀 등) 새롭게 나온 아이디어는 없는지 등에 대한 공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클라이언트가 디자인 진행 상황을 파악하고 싶듯이, 디자이너들도 마찬가지이다. 예기치 못하게 기획의 방향성이 바뀌었을 경우에는 더 확실하게 공유가 되어야 한다.
제작 단계에 들어가서부터는 시간 싸움의 측면에서 협조가 필요하다. 이미지나 영상 클립, 캐치프라이즈 같은 작업에 필요한 소스들이 제시간에 공유가 되어야 그들이 원하는 데드라인에 맞출 수가 있다. 디자이너가 매번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몇 시간 만에 물을 길어올 수 있는 슈퍼맨은 아니다.
이건 클라이언트뿐 아니라 일을 잘하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해당되는 내용이다. 미팅 약속 잘 지키기, 워크 타임 파악하기, 서로의 수고로움 인정하기 등과 같은 것들이다. 협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배려'이다. 여기서 말하는 배려는 좋은 말만 해주고 감정적 위로를 하는 등 쓸데없는 호의를 베풀자는 의미가 아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고치를 낼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 지를 생각하는 것. 어찌 보면 정말 당연한 것인데 이것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하다. 가장 기본적인 시간 약속조차 어기는 클라이언트들도 많이 봤는데, 그들의 생각 기저에는 스스로의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이 깔려있을 것이다. 그 생각부터가 협업을 하기에는 아직 미성숙하다는 증거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결국 자기 일을 잘하는 사람들은 협업을 할 때 아무리 의견 충돌이 있었어도 좋은 끝을 맺는다. 소비자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냄은 물론이고 그 일에 짧게는 2개월, 길게는 반년 넘게 얽히고설켜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뿌듯함만을 남긴다. 그 지난한 과정에서 얼마나 힘들었고 얼마나 피 튀겼는지 잊은 채 결국 모든 것이 건설적이었던 과정으로 남는다. 하물며 그들은 그의 넥스트 프로젝트에도 기꺼이 함께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시청률, 괄목할만한 성과, 화제성 등을 쟁취하였지만 함께한 사람들의 고통과 야유 속에서 끝난 프로젝트도 과연 성공적인 아웃풋이라 할 수 있을까?
최근에 블라인드라는 익명 기반 플랫폼에서 어떤 Pd의 험담이 초성으로 떠돈 적이 있다. 몇 년 전에 나도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터라 초성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 당시에도 자기 성과에 취해 유관부서를 괴롭히는 일이 잦았는데 그 글을 쓴 사람들은 유관부서가 아닌 그가 이끄는 팀의 내부 사람들이었다.
이렇듯 당장의 성공은 이룰 수 있겠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소거될 것이며 결국 작품마저 안 좋아지는 최악의 결론까지 다다를 수 있다.
디자이너로 7년 동안 일을 하면서 관찰하고 발견했던 좋은 클라이언트의 특징을 적어보았는데 어찌 보면 일잘러 리더나 PM의 모습으로도 생각된다.
업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는 지금, 디자이너가 콘텐츠 기획자나 CBO가 되고 기획자들이 포토샵과 ai를 배우는 일들은 흔히 일어나고 있다. 이런 생태계에서 결국 일잘러들은 좀 더 '본질적인 사고'로 접근하며 여러 사람들을 통솔하고 같이 이끌어가는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이런 사람들은 한 번의 실패가 있었어도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기에 계속 사람들이 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