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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다래 Jan 28. 2022

가장 좋아하는 컵

오늘의 청소 - 컵

 물을 한잔 마시려고 선반장을 연다. 늘어서 있는 크고 작은 컵들. 한쌍은 꽃무늬가 그려진 폴란드컵 - 가끔 이 잔에 커피를 내려마시면 기분이 좋다, 한쌍은 좋아하는 작가가 그린 캐릭터 컵 - 작지만 귀여운 맛이 있다, 한쌍은 결혼할 때 선물 받은 브랜드 컵 - 선물해주신 분의 마음을 생각하며 고급 컵이니 애껴써야지 한다, 한쌍은 일본 여행 갔을 때 산 애니메이션 캐릭터 컵 - 지금까지 열렬히 좋아하진 않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련해진다, 그리고 자주 쓰는 텀블러와 잘 손이 가질 않는 러시아 주물 잔, 일본 지브리 애니메이션 찻잔. 

 

무심히 컵 하나를 고르고 물을 따라 마신다. 대부분 결혼할 때 선물 받은 컵(결혼 컵)이나 애니메이션 컵이 손에 잡힌다. 조금만 적당히 마셔야지 싶을 땐 결혼 컵을, 많이 마셔야지 하고 의욕이 차오를 땐 애니메이션 컵을 선택한다. 하나 둘 꺼내 쓰다 설거지가 쌓이거나 손님이 오면 캐릭터 컵, 폴란드컵 순으로 꺼내 사용한다. 러시아에서 산 주물 컵이나 일본 애니메이션 찻잔엔 대체로 손이 가질 않는다. 특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는 찻잔은 몹시 예뻐 아끼고 아낌에도 불구하고 그 쓰임엔 박하다. 


 물 마시기엔 뭔가 아쉽다. 콜라나 주스를 마시기엔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콜라나 담으려고 만들어졌단 말인가 하며 자괴감을 느낄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렇다고 즐기지도 않는 녹차를 억지로 마실 수도 없고, 티백 녹차를 마시기엔 티백 끝 종이 부분을 걸칠 데도 없어서 여차하면 물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기 마련이다. 잔이 두꺼운 듯싶지만 뜨거운 물을 넣으면 바깥까지 전도가 너무 빨리돼 손으로 잡고 마시기엔 너무 뜨겁다. 적당히 식으면 마셔야지 하고 방치하면 딱히 보온이 되는 컵도 아닌지라 금세 차가워져 버린다. 가장 좋아하는 컵이지만 매번 눈으로만 감상하는 컵 이상은 될 수 없는 상황.


 선반장을 열 때마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컵을 보며 너도 뭔가 쓰임이 있을 텐데- 네 쓰임을 찾아주지 못해 미안하다- 하고 속삭였다. 언젠가 내가 이 컵을 컵으로서 더 이상 쓰임이 없다고 생각되면 당근에 팔아버리거나 나보다 더 잘 사용해줄 친구에게 선물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기엔 난 이 컵을 너무 좋아하고 예뻐한다. 그 마음속엔 꼭 잘 사용하고 싶은 나의 욕심도 함께다. 이 컵을 내 삶에 더 밀접하게 사용할 수는 없을까.


 양치컵? 그래, 차라리 양치컵으로 쓰자. 우리 집엔 양치컵이 없다. 전에 사용하던 양치컵은 깨진 뒤 다시 사지 않았다. 욕실 선반에 컵을 올려두는 것도 싫고 예쁘지도 않은 컵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꽤나 못마땅했다. 그런데 이 컵이라면? 늘어놓을 용의가 있다. 그리고 사용하고 난 뒤 장에 올려 넣어놓으면 보이지도 않는다.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난 욕실로 달려가 칫솔 옆에 컵을 나란히 세워본다. 역시, 마음에 든다. 거울 장을 들어 컵이 들어갈 자리를 확보한다. 여차하면 올려놓고 올려놓지 않아도 어느 방향에서 바라봐도 마음에 든다. 가장 좋아하는 컵을 아침저녁으로 매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주방에선 쓰임이 애매한 녀석이었건만 욕실에 와서는 누구보다 열일하는 컵이 되었다. 나를 즐겁게 해주는 컵이라는 게 가장 큰 열일. 새로운 쓰임이 생긴 것도 좋고, 예쁜 컵이 맞아주는 욕실도 좋다. 컵 하나로 이렇게 화사해질 수 있다니. 이런 생각을 해낸 내가 그저 뿌듯할 따름. 컵의 용도나 가격을 생각하면 왜 그게 이런 곳에...? 하며 의아할 수 있지만, 비싼 컵이야말로 가장 열일하는 장소에 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좋은 거니까 아껴야지-라는 생각은 버린 지 오래다. 좋은 물건일수록 열일하길 바란다. 그렇게 내 주변 모든 좋은 것들을 아낌없이 사용할 생각이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 좋아하는 물건으로 가득 차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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