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음악을 보는 엉뚱한 시각
언제나 엉뚱한 일들에 관심이 많은 음악박사 김유정입니다.
서양악기를 연주하여 대학에 들어가면 “서양음악사”라는 낯선 과목을 접하게 됩니다. 중고등학교 때 국사와 세계사는 잠시 배운 적이 있는데 음악사라니, 무슨 역사 과목인가 하고 들어가서 수업을 듣다 보면 역사인 듯 역사 아닌 옛날이야기들을 들으며 음악을 틀어주는데, 이 과목이 도대체 역사 과목인지, 아니면 음악 수업인지 헷갈리곤 했습니다. 무엇을 해도 똑같이 들리는 이름조차 듣보잡인 중세, 르네상스 음악을 지나 겨우 그래도 예전에 이름은 들어보았다 하는 작곡가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크 음악부터입니다.
기계적으로 1600 년부터 1750 년까지 유럽의 예술 음악을 말하는 것이 바로크 음악이라고 외웠지만, 몬테베르디부터 바흐의 죽음까지가 그 기준이 된다고 가르쳤지만, 도대체 그때가 언제인지, 가늠할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배경에 건반악기 소리가 들리면 바로크다 라는 듣기 시험 꿀 팁을 알고 난 다음에는 더욱더 관심이 없었고요. 마치 끝없는 자가 복제를 한 듯한 비슷비슷한 멜로디에 독주자들도 떼로 몇 명씩 등장하는 바로크 음악은 화려한 기교와 큰 소리로 청중을 압도하고 싶은 21세기 연주자들에게 커다란 메리트가 없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바로크가 저에게 특별하게 다가온 것은
2021년, “옷소매 붉은 끝동”이라는 드라마를 시청하면서였습니다.
조선 영조와 정조 임금의 이야기를 다룬 이 드라마를 보며 도대체 조선 후기라면 몇 년일까?라는 엉뚱한 궁금증이 발동했습니다.
네이버 검색을 해보았더니, 세상에! 영조는 바로크와 고전음악시대를 아우르며 살았던 임금이더라고요.
왜 평생을 바로크는 더 멀고 영/정조는 저와 더 가깝게 느껴졌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의 엉뚱한 궁금증은 서양의 음악사를 한국사에 대입해보기 시작했습니다.
1592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임진왜란이 있던 해이지요. 1392년 건국한 조선이 건국 2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지만, 이후로의 조선은 XX왜란, OO호란 등 다른 나라의 침략 소식이 110년을 멀다 하고 들리게 되는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요.
1590년대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희곡을 연구하는 동아리 같은 소모임이 유행을 합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이런 모임은 카메라타라고 하는데요, 이들은 그리스의 희곡(연극)에 음악을 넣어 연주하는 “오페라”라는 것을 실험하기 시작합니다. 현존하는 최초의 오페라는 1600년,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로 알려졌지만, 1590년대부터 페리, 카시니 등이 오페라를 작곡해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악보가 유실되고, 완전체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몬테베르디가 최초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사실 그 시작은 1590년대부터지요.
여기서 엉뚱 김박사의 또 하나의 쓸데없는 지식 하나!
이탈리아 피렌체의 바르디 백작의 주도하에 그리스 희곡을 연구하는 모임의 중요한 연구원 중 한 사람이 빈센초 갈릴레이였다는 겁니다. 누구냐고요? 바로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아버지이지요. 류트 연주자이자 이론가였던 빈센초는 진취적인 생각을 가진 예술인들의 모임인 피렌체 카메라타에 합류, 새로운 음악의 지평을 열지요. 어쩌면 빈센초의 이러한 앞서가는 지식에 대한 열망이 갈릴레오에게도 전달되어 지동설이라는 획기적인 주장을 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조선은?
뭐했냐고요?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정유재란, 인조반정, 정묘호란까지 30 년간 나라가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물론 이 침략의 역사는 1637년 병자호란으로 그 대미를 장식하지요. 개인적으로 한일합방보다 더한 굴욕이라고 생각하는 삼전도의 굴욕을 참아내며 겨우겨우 국권을 지키려는 인조 임금님이 애쓰실 때, 유럽에서는 오페라가 귀족 문화를 넘어서서 오페라 극장이 도시마다 생겨나며 그 지평을 넓혀가지요.
여기서부터 조선과 유럽 문화의 차이가 나기 시작하는 것 같아 엉뚱 김박사는 마음이 무척 슬펐답니다
바로크 음악
은 오페라를 뛰어넘어, 기악음악으로, 세속 음악과 종교음악을 아우르는 예술의 한 장르로 뻗어나가게 됩니다. 초기 바로크 음악이 이탈리아의 작곡가들을 중심으로 했다면, 바로크 후기에는 바흐, 헨델 등 독일권 작곡가들로 그 주도권이 넘어가게 되지요.
1685
음악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불리는 동갑내기 작곡가인 바흐와 헨델이 태어난 해 이기도 하지만, 전기 바로크와 후기 바로크를 나누는 기점이 되기도 하지요. 전기 바로크가 오페라를 중심으로 발달했다면, 후기 바로크는 기악음악과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인한 신교도의 종교음악이 그 주류를 이루게 되지요.
이때 조선에서는
엄청난 여인 한 분이 "여인천하"를 누리고 계시는데,
10년이 멀다 하고 드라마를 장식하는 장희빈이 처음 왕의 후궁인 소의로 책봉되는 것이 1686년이니, 무언가 서양음악사와 한국사가 묘하게 겹쳐지며 외우기가 쉬워지네요.
바흐
는 무척이나 다복하고 편안하게 음악생활을 했습니다. 라이프찌히 교회의 음악가로 정착한 후, 비교적 안정적으로 작곡을 하였고, 2번의 결혼에서 얻은 20명의 자식들 중 3 명이 음악가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지금 음악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것 과는 달리, 자신을 그저 교회 음악가로 여기며 살던 바흐는 그가 죽고 약 100여 년이 지나서야 그 진가를 타 음악가들이 알아보기 시작하지요.
반면 헨델은
음악가가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어야 하고, 심지어 원하지 않는 여성과의 정략결혼도 생각해 보았답니다.
자신의 음악적 기량을 펼치기에 독일은 너무 좁다고 생각한 헨델은 영국에 정착해 그 재능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바흐와 달리, 건강 악화와 재정적인 문제로 고민하던 헨델은 "할렐루야"로 유명한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한 후 명성과 안정을 되찾아 영국에서 추종을 받게 됩니다.
1750년
바흐의 죽음으로 바로크 음악은 저물기 시작해, 1759년 헨델이 영국에서 숨을 거두며 고전 음악으로의 대 장정을 시작합니다
조선에서는 또 한 번의 기가 막힌 일이 이 즈음 일어납니다.
1762년, 당시 임금이던 영조가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굶어 죽게 하지요.
자신의 친자를 이리도 처참히 죽인 예가 역사에 또 있을까요?
서양의 음악과 문화는 점점 더 꽃을 피워가는데,
조선에서는
왜 이리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혹시....
후대에 이 일들을 배경으로 멋진 드라마를 만들라고 그랬을까요?
옷소매 붉은 끝동을 보다가 시작한 궁금증이 바로크 음악까지... 산만하고 엉뚱한 김박사의 뇌구조 어떤지,제 자신도 궁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