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진주래요!
바로크 음악은 서양음악을 몰라도 자연스럽게 저희 생활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비발디의 사계나,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프렐류드 등은 광고 음악, 혹은 지하철 환승역을 알리는 알람 등에 사용되어, 클래식 음악을 전혀 모르더라도, 아! 이 곡! 하고 친숙해진 곡입니다. 바로크를 표현하는 여러 가지 말들이 있는데, 일단, 그 어원부터 살펴보기로 하지요. 바로크는 모양이 일정치 않은 천연 진주를 뜻하는 포르투갈어에서 유래됐다네요. 19세기 미술 비평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 용어는, 과장되고 대담한 것을 목표로 했던 1600 년부터, 1750 년까지의 예술을 칭하는 보편적인 단어로 자리잡지요. 다양한 양식이 등장해 한마디로 표현이 안 되는 이 시기의 음악에는 아주 적합한 단어인 듯해요.
과학
17세기는 음악뿐이 아니라, 여러 가지 면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네요. 일단, 과학에서,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가 1632년 교황청 재판을 받으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씀하셨고 뉴톤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표한 것이 1687년이며, 프랜시스 베이컨은 과학이 권위가 아닌 관찰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이때니,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과학적인 기초가 이때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속이 상한 것은, 이때, 조선은 15세기 중반에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훈민정음과 측우기, 해시계 등을 발전시키기는커녕 1592년 병자호란을 시작으로 온갖 난리에 시달리며, 광해군의 폭정, 숙종의 여인 시대를 거쳐 1724년 영조가 즉위할 때 까지는 온통 XXX의 난, XX정변 등으로 온통 정신이 없었으니, 여기서부터 조선이 유럽 과학의 발달을 따라가지 못한 것 같아 무척 아쉽습니다.
사회
유럽의 정치 상황도 격변을 했습니다.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종교적 갈등이 시작되어 영국의 청교도들이 메이 플라워라는 배를 타고 1620년 새 대륙인 아메리카로 향하고,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는 30년 전쟁이 발발해서 독일의 어떤 지역은 인구의 반이 줄었습니다. 새로 독립한 네덜란드를 필두로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나라들은 식민지를 개척하여 무역을 하고 노예를 들여왔으며, 동시에 유럽의 음악을 새로 개척한 나라들에게 전파하고, 그들의 음악을 들여왔습니다. 개인이 재산을 축척할 수 있는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하여, 공동 출자 회사라는 것이 생겨 이익을 극대화하고 위험을 최소화했으며, 돈을 가진 자본가들이 공공 오페라나 연주회를 즐기기 시작했으며, 이들이 악기를 배우고 연주를 시작하며 악보, 악기, 레슨의 수요도 증가했습니다. 음악가들은 궁정과 교회 이외에도 도시의 후원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아카데미"라는 사적인 모임이 생겨 났는데, 이들은 공부 같이 하고, 음악활동을 지원하는 일이 중요 목적 중의 하나인 동아리 형태의 모임이었습니다. 베네치아에는 1637년 공공 오페라 하우스가 아카데미의 후원을 받아 시작됐고, 1627년 영국의 배니스터라는 바이올리니스트에 의해 최초의 유료 공연이 시작됩니다.
예술
영국의 셰익스피어, 프랑스의 코르네유, 몰리에르 등은 연극을 썼으며, 밀턴의 "실낙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등 이 시대의 작품이고 아직도 읽히고 있으니 그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지 이해가 좀 되시나요? 이들은 한결같이 극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데 초점을 두었으니, 그 파급력이 예술의 다른 장르에도 어마어마했습니다. 미술에서도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던 르네상스의 미켈란젤로 스타일에서 벗어나, 극적인 효과를 드러냄으로 관중들이 아름다운에 감탄하는 것뿐 아니라 정서적인 감동을 끌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했습니다.
위의 그림은 바로크 화가들이 추구하던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가장 멋진 작품으로, 16세기 스페인의 수녀인 아빌라의 테레사가 천사가 화살을 쏘아 자신을 찌르는 환상을 보는 장면을 연출한 것인데, 종교전쟁에서 방황하는 가톨릭교도들이 종교개혁에 반대하게 만들고자 하는 설득의 의지가 담긴 작품입니다. 화살을 맞는 테레사의 일그러진 얼굴이며 흐트러진 옷자락을 섬세하게 대리석으로 표현해 낸 이 작품은 벽에 단단히 붙어있어 마치 공중에 떠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며, 무엇보다 위의 숨겨진 창에서 내려오는 금빛 불빛은 조각상의 뒤편으로 내려오며 환상적이며 경건한 마음이 들게 합니다. 베르니니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도 설계했는데, 두 개의 반원 모양의 광장에 네 개의 기둥이 교회가 세계를 다 품 안에 안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려 했다네요. 아직도 교황청 있는 로마의 바티칸에는 1657년 베르니니가 설계한 그대로의 성 베드로 광장이 남아있습니다.
감정
인간이 느끼는 슬픔, 기쁨, 분노, 사랑, 공포, 흥분 등의 감정은 이전에는 신앙심으로 무장하여 꽁꽁 숨겨 놓아야 할 쓸데없는 감정의 낭비였지만, 바로크 시대에는 이를 표현하거나 발생시켜야 하는 필수 요소였습니다. 이를 위해, 바로크의 작곡가들은 기악음악에서는 특수화된 관습적 기법으로, 성악 음악에서는 가사, 정서나 성격, 혹은 극적 상황을 나타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몬테베르디(1567-1643)는 그의 마드리갈 집 5권의 "무정한 아마릴리"에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불협화음을 무정한 이라던지 아!라는 가사들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몬테베르디의 이러한 불협화음의 사용은 당시 음악가들 사이에서 커다란 논란거리를 만들었고, 급기야는 조반니 아르투지와의 설전이 시작합니다. 르네상스 화성학의 기본을 져버렸다는 비판에, 몬테베르디는 자신의 불협화음은 르네상스의 규칙을 넘어선 제2의 작곡법, "second practice"라고 반박합니다. 몬테베르디는 9권의 마드리갈 모음곡을 출판했는데, 이 중 앞의 4곡은 르네상스 정통을 따라 대위법을 준수하고 각 성부에 동등한 비중을 주었고, 제5권은 2 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는 르네상스 정통 기법으로, 2 부는 극적인 표현을 위해 주선율이 소프라노와 베이스 파트에 편중되게 작곡했습니다. 이후, 몬테베르디는 자신의 작곡기법에 만족하여 나머지 4 권을 제2 작법으로 작곡하며, 더 이상 틀에 박히지 않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음악으로서의 길을 열며 바로크의 원조 할아버지로 등극하시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