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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cElephant Aug 11. 2017

분노가 향해야 하는 곳

영화[내일을 위한 시간]/책[분노의 포도]

영화: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감독 [내일을 위한 시간 (Two Days, One Night)]

책: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절. 평생 밭을 일구며 살던 사람들이 트랙터에 밀려 하루아침에 땅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분노의 포도」에서 조드 일가 역시 고향을 버리고 일자리를 찾아 떠난다. 800명의 (그들이 생각하기엔 엄청난 숫자의) 인부를 모집한다는 전단지 하나에 희망을 걸고 고물 차에 비루한 살림살이와 온 가족을 욱여넣어 꾸역꾸역 캘리포니아로 향했지만 굶주림이 끝나는 곳은 없었다. 일자리는 있었다. 하지만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은 훨씬 더 많았다. 800명을 모집에 몰려든 사람은 30만 명, 품삯은 처참하게 떨어지고 그나마도 없어서 서로 아귀다툼을 해야 했다. 그러므로 배고파야 했다.


 하루 종일 온 가족이 일하고 겨우 저녁 한 끼 먹을 양의 돈을 받는 일자리지만, 그마저도 구할 수 있는 게 행운이라고 할 수 있는 삶. 집과 내일이 없는 당장 오늘 지금뿐인 그들에게 분노의 화살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내 일자리의 경쟁자인 나와 마찬가지로 하루 벌어 한 끼 먹는 옆 집 천막 사람인가, 최소한의 인간적인 임금과 처우를 보장해달라고 고용인에게 맞서다가 그나마 지금 있는 일자리에서 마저 쫓겨나게 만드는 일자리 동료인가. 진정 분노가 향해야 할 곳은 너무 멀고 아득해서 참을 수 없는 노여움과 원망이 나 자신과 멀지 않은 심지어 나와 다를 게 없는 상대에게 쏟아진다. 그리고 누군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을 떠올렸다. 주인공 산드라는 병가 후 복귀를 앞두고 해고될 위기에 처한다. 회사가 산드라의 복직이냐 보너스 100유로냐를 두고 직원들한테 투표를 진행했고, 결과는 산드라의 해고였던 것이다. 작업반장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 재투표를 하기로 하고 산드라는 남은 주말 이틀 동안 동료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가 자신의 복직을 찬성해달라고 힘겹게 부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들이 곤란해하고 주저한다. 심지어 화를 내기도 한다. “너의 상황은 안타깝게 생각해. 하지만 난 100유로가 필요해.” 그 돈이 간절한 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엄청난 액수이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먹고 살기 빠듯해서다.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르는 산드라와 보너스를 못 받을지도 모르는 동료 직원들은 결국 모양새만 다를 뿐 모두 피해자다. 휴직 후 복귀 문제와 일한 것에 대한 보너스 지급은 각각 별개의 사항이며, 어느 하나가 다른 것 때문에 불이행되는 것은 결코 결코 상대방 때문이 아니다. 그럼 회사 혹은 고용주의 책임인가? 일단은 그렇다. 직원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을 만큼의 경영 악화 상태를 초래했고, 해결 과정에서 생기는 껄끄러운 갈등들을 모두 직원들에게 전가했다. 투표라는 민주적인 방법을 통해 결과를 낸 척 결국 손 안 대고 코 푼 격.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회사보다 더 상위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논의다. 회사는 자본에 따라 움직인다. 이윤 창출이 최고이자 유일한 목표다. 그 기준에서 산드라의 복직과 동료 직원들의 보너스를 건 잔인한 저울질은 극히 정상적이다. 각각 별개의 사항일지 모르지만 결국 돈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을 모두 챙겨주려면 돈이 부족해. 그러니 하나만 선택해.’ 이것이 회사 입장에서 뭐가 잘못됐을까? 사람을 해친 것도 아닌데? 그럼 자본주의가 문제인가? 아니, 자본주의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인데 마치 모든 것의 근간인 것처럼 만들어버린 사회에 문제가 있지 않나? 탐욕, 가진 자가 되려는 욕망. 더 갖기 위해서는 덜 가진 자가 있어야 하고, 그것의 한계란 없다. 이 욕망이 사람들을 극단의 상황으로 몰아가지 않고 사회가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 곧 사회가 할 일이지 않나? 사회라는 게 지금 제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다면 또 그 이유는 무엇일까? 책임을 따지는 질문은 끝없이 올라간다. 점점 올라갈수록 실체는 없고 허공에서 허우적댈 뿐이다. 그 공허함을 참을 수 없어 당장 옆의 나와 비슷한 상대에게 화를 내고 책임을 따진다. 그게 가장 쉬울 수 있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다. 계속 생각하고 따져야만 한다. 책임자를 처단하기 위함이 아니다. 어디서 잘 못 되었는지를 알아야 문제를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값을 유지하기 위해 덩굴과 나무의 뿌리가 만들어 낸 열매들을 파괴해 버려야 한다. 이것이 무엇보다 슬프고 쓰라린 일이다. 차에 가득가득 실린 오렌지들이 땅바닥에 버려진다. 사람들이 그 과일을 얻으려고 먼 길을 왔지만, 그 사람들을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냥 차를 몰고 나가서 오렌지를 주워 올 수 있다면, 열두 개에 20센트를 주고 오렌지를 사 먹을 사람이 있겠는가? 사람들이 호스를 가지고 와서 오렌지에 휘발유를 뿌린다. 그들은 과일을 그냥 주워 가려고 온 범죄자들에게 화가 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며 과일을 먹고 싶어 하지만…… 산더미처럼 쌓인 황금색 오렌지 위에는 휘발유가 뿌려진다. <분노의 포도 中>


 약자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드는 사회, 그래서 웃는 자는 따로 있는 사회. 1930년대도 지금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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