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진심으로 엄마랑 같이 여행 가기로 한 결정을 후회하고 있어.
아직 여행은 시작조차 못했는데 말이야...!
유럽의 수많은 나라 중 어떤 곳을 방문할지 정하는 일까지는 할만했어. 난생처음 가는 유럽 여행이니까, 할 수만 있다면 모든 나라에 가보고 싶어 하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이야. 그런 엄마를 최대한 배려해서 겨우겨우 16박 18일 동안 5개 나라를 둘러보는 일정을 잡는 건 그렇게 힘들지 않았어. 솔직히 내 기준에서는 다소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거기까진 정말 괜찮았다니까?
그런데 엄마가 이제 숙소 정하는 걸로 나를 말려 죽이려고 하네? 엄마는 이렇게 말하면 기억 안 난다고 할 테니까 숙소 예약을 하기 위해 우리가 나눈 대화의 극히 일부분을 여기에 옮겨볼게.
"숙소는 별이가 알아서 예약해. 엄마는 네가 좋으면 다 좋아."
"엄마 첫날 숙소는 여기 어때? 위치도 좋고, 가격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거 같아."
"음, 여긴 엘리베이터 없이 3층인가? 엄마 그럼 힘들어서 못 올라가."
"아차, 엄마 무릎 안 좋지. 그럼 여기 어때? 4층이지만 엘리베이터 있어!"
"근데 여긴 좀 어둡다. 해가 잘 안 드나 봐. 해를 잘 못 보면 사람이 우울해진다고..."
"아 그래, 그럼 엄마 여기는? 이 정도면 밝고 괜찮은 거 같은데?"
"그렇긴 한데... 솔직히 별로 안 예쁘네. 엄마는 기왕 현지인이 사는 집에 묵는 거면 좀 더 예쁘고 뭔가 유럽 느낌도 물씬 나는 그런 집이었으면 좋겠는데..."
"후아, 그럼 여긴 어때? 나의 마지막 카드야!"
"어머 어머 여기 정말 좋다! 아 근데, 여긴 너무 비싸네 조금 더 싼 곳은 없어?"
"엄마... 싸고, 예쁘고, 위치도 좋고, 해도 잘 들고, 엘리베이터까지 있는 곳이 어디 있어! 아 언제는 내가 좋으면 다 좋다며! 다 괜찮다며!"
"미안 미안, 엄마는 진짜 다 좋아! 엄마는 괜찮으니까... 엄마 신경 쓰지 말고 별이가 다 골라! 엄마는 이제 아무 말도 안 할게."
"....................."
이렇게 글로 써서 보니까 엄마가 나한테 얼마나 몹쓸 짓을 했는지 좀 알 거 같지 않아?
결코 만족을 모르는 아주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를 만나 머리를 쥐어뜯다가 원형 탈모 걸려서 매일 아침 해 뜨는 걸 바라보며 눈물의 사직서를 쓰는 그런 느낌이었어. 엄마와의 유럽 여행을 준비하는 내 마음은.
그럼 때려치우면 그만 아니냐고? 아니지 아니야.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내가 그 클라이언트를 사랑하는 거야. 그것도 아주 많이. 그래서 티켓을 취소하는 대신 열심히 생각해 봤어. 엄마는 도대체 왜 저럴까...?
그랬더니 두 가지 결론이 나오더라고.
하나, 엄마는 본인이 뭘 원하는지 잘 모른다.
둘, 엄마는 본인이 원하는 걸 안다고 해도 그걸 말하는 게 어렵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결론의 원인은 딱 하나더라.
엄마는 지금까지 아주 오랜 시간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살아왔다.
59년생 최인실이 아니라.
긴 세월 동안 엄마는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말하는 대신 그걸 적은 조약돌들을 만들어 온 거야. 그리고 그걸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으며 걸어온 거지. 난 엄마가 포기한 것들로 만들어진 반질반질 조약돌 길을 퐁, 퐁, 퐁 가볍게 밟고 30년이 넘는 세월을 신나게 달려왔어. 발에 진흙탕 한 번 안 묻히고 말이야. 그러니 나는 언제나 '이거 할래, 저거 줘, 다 먹을래!'하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거고, 엄마는... 아닌 거지. 아까 성질낸 게 미안해지더라. 휴.
다행히 지금 우리 둘은 그 길의 어딘가에서 만났어. 좋은 타이밍이 온 거야.
그걸 깨닫고 난 후, 내게는 이번 여행에서의 작은 목표가 생겼어. 엄마가 뭘 하고 싶은지, 어딜 가고 싶은지, 뭘 먹고 싶은지. 그때그때 솔직하게 말하는 연습을 이번 여행에서 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거! 그리고 그 더딘 과정에서 제발... (안 싸우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 최소한의 싸움을 하자는 거?
어때? 우... 우리 잘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