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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Aug 27. 2018

시차 적응


엄마, 

여행 첫날인데 날씨가 꾸물꾸물하다. 



비행기에서도 기차에서도 이곳, 벨기에 브뤼셀의 에어비앤비 숙소에서도 잘 잔 나와 달리 엄마는 거의 밤을 새운 것 같아. 새벽 5시쯤 되었을 때, 엄마가 뒤척이는 소리며 거실로 나가 서성이는 소리를 비몽사몽 들었거든. 아침에 일어나 창 밖의 풍경처럼 흐린 엄마의 얼굴과 띵띵 부은 다리를 보니 아무리 졸려도 잠시 일어나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넬 걸 그랬나 싶어 면목이 없더라. 여행은 이제 겨우 시작인데 무릎과 허리에 파스를 덕지덕지 바르고 퀭한 얼굴로 앉아 있는 엄마를 보니 앞으로의 여정이 걱정되기도 하고 말이야.



브뤼셀과 서울의 시차는 7시간이야. 


엄마는 시차 적응이 처음이니까 많이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처음으로 겪었던 시차는 대학생 때 교환학생이 되어 뉴욕으로 떠났을 때였어. 내 몸은 한창 잘 시간인데 해가 중천에 떠 있고, 잠 기운이라고는 1도 없는 맑은 눈으로 시곗바늘이 3시에서 4시로, 다시 4시에서 5시로 넘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기분은 정말 당혹스럽지. 처음엔 억지로 잠을 자려 노력하기도 하고, 낮 시간에 잠이 들지 않으려고 커피를 연거푸 마시기도 하면서 버텨보지만 쉽지 않다는 걸 알아. 어느새 난 또 깊은 낮잠에 쓰러지듯 빠져있고 눈을 뜨면 저녁이 되어 있는 거지. 그럼 다시 난 날밤을 까는 거고. 그게 반복되면서 몸이 너덜너덜해지는 거야.


그럼 시차는 영원히 적응할 수 없는 건가 하면 물론 그건 아니야. 인간에겐 어떤 것에도 적응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이 있잖아. 다들 저마다의 시차 적응 비법이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시차 적응에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시간을 들이는 거야. 지금 우리처럼 바로 뭔가를 해야 하는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마침 딱 맞는 방법이기도 하지.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억지 노력을 멈추고, 하루 만에 안 되면 이틀 그리고 사흘.. 그렇게 천천히 몸이 시간에 적응할 수 있도록 기다리는 거야. 물론 우리가 출장을 와서 당장 미팅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한국에서부터 시차 적응의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한 특별한 일들을 하는 게 좋았겠지. (3일 전부터 매일 1시간씩 일찍 일어난다거나 하는 그런 것들이 있더라고.) 하지만 우린 긴 여행을 떠나왔으니까. 아주 천천히 해도 괜찮아.

 


아침은 신라면과 맥심 커피였어. 


벨기에까지 와서 무슨 신라면에 맥심 커피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난 그것들이 시차 적응 때문에 힘들어하는 엄마를 살릴 수 있는 생명의 음식(?)이라고 생각했어. 음식이 아니라 일종의 긴급 처방약이었던 거지. 한국에서부터 억지로 지구 반대편까지 질질 끌려오느라 잔뜩 성이 난 몸에게 다급히 신라면과 맥심 커피를 바치며 이렇게 사죄하는 거야.


'자, 이것 봐.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야. 그러니 부탁할게. 조금만 더 힘을 내줘!'


칼칼하고 뜨끈한 신라면과 달달하고 향긋한 맥심 커피 콤보 처방은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 엄마가 나와 산책을 나갈 만큼 기운을 냈거든. 


엄마도 알겠지만 내가 가장 선호하는 여행의 첫 스케줄은 바로 산책이야. 아무런 계획 없이, 지도도 없이, 여유를 부리며 숙소 근처를 걸어 다니는 거지. 그러면서 도시의 공기를 천천히 내 안으로 들여놓는 거야. 일종의 모드 변환 방법이지. 이 방법은 버튼을 딸각, 하고 누르는 게 아니라 아주 조금씩 다이얼을 돌리는 것에 가까워. 한 걸음 한 걸음에 눈을 한 번씩 깜박이면서 속으로 한 단어씩 말해 보기도 해. 


'나. 김별. 지금. 여기. 벨기에. 브뤼셀. 엄마랑'


그렇게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난생처음 와보는 낯선 도시가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는 거야.  

여긴 벨기에니까 아마도 Bonjour! 



브뤼셀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도시였어. 가이드북에 나오는 거의 모든 장소가 숙소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모여있더라고. 일부러 찾아간 게 아닌데 조금 걷다 보면 하나가 나오고, 더 걸으니 하나가 더 나오는 식이어서 우연한 발견의 즐거움이 있는 산책이었지. 엄마는 건물과 건물 사이에 공간이 없이 다닥다닥 붙은 집들을 연신 올려다보며 즐거워했어. '어머 저 건물 좀 봐라 저렇게 폭이 좁은 건 처음 본다, 세상에 저 벽화 좀 봐, 아니 저 가장 꼭대기 집만 창문이 다르네 집 주인네 집인가.' 엄마는 활기차게 재잘거렸어.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간이 흘러 오후 1시 정도가 되자 엄마는 선언했어. 더 이상은 아무래도 무리라고 말이야. '아니 벌써?'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지만, 금세 이해할 수 있었어. 새로운 도시를 발견하는 기쁨도 엄마의 아픈 무릎과 수면 부족으로 온 피로를 압도하진 못했던 거야. 우리는 결국 짧은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어. 오후 1시에 말이야! 난 그게 웃겨서 계속 속으로 생각했어. 


'오후 1시에 숙소로 돌아가다니... 오후 1시에 숙소로 돌아가다니! 엄마랑 여행하니까 특별하고 재미있네!'



난 지금 코를 골며 자는 엄마를 방에 두고 거실에 나와 혼자 맥주를 마시며 창 밖을 보고 있어. 처음 보는 맥주들로 고심 끝에 3캔이나 샀는데 이걸 다 마실 때쯤이면 엄마가 일어나려나, 생각하며 벌컥벌컥 들이켜지 않고 천천히 홀짝이고 있어. 숙소가 제법 높은 곳에 있어서 그런지 창 밖으로 다른 건물들의 지붕이 보여. 이곳의 지붕은 오렌지색과 아이보리색이 가장 많은 것 같아. 밝고 경쾌한 색이지만 날이 흐려서 그런지 차분하고 무게감 있게 다가오네. 이런 날 폭신한 이불속에서 잠을 자면 완전 꿀이잖아. 일어나면 개운하고. 부디 엄마가 지금 엄마의 몸과 편안한 관계를 되찾을 수 있는 좋은 잠을 자고 있기를 바라.

 

난 사실 지금 좀 지루하고 빨리 밖으로 뛰어나가 놀고 싶지만 엄마와 나, 우리 사이의 시차도 이렇게 적응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기다리려고 해. 시차 적응을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시간을 들이는 거니까. 


시차 적응이 느린 엄마. 
걸음이 느린 엄마.
피로 회복이 느린 엄마

그리고 내가 아주 어릴 때, 
모든 게 느린 나를 기다려준 엄마.
  
엄마가 내게 해 준 것처럼
이젠 내가 엄마를 기다릴게! 



엄마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4시에는 일어날 거지? 아님 5시에는? 

오늘 나랑 오줌싸개 동상 보고 1유로짜리 벨기에 와플도 먹기로 했잖아. 응응,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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